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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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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연어를 따라오면 한국입니다
함광복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책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 아는 이가 책 한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노란 국화 한 송이를 입에 물고 있는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표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할아버지, 연어를 따라오면 한국입니다’라는 제목이 세로로 서 있는 책이었습니다.
검은 색과 노란 색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 표지 색상의 기본 톤도 그랬고, 노란 국화를 입에 문 커다란 검은 새, 서술형의 긴 책 제목이 위태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제목의 배열 등 제가 받아 든 책은 분명 여느 책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일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쉽게는 짐작할 수 없는 강한 메시지가 표지로부터 풍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낯선 느낌도 잠깐, 이내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펼쳐 들었던 것은 표지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작은 부제 때문이었습니다. “함광복, 30년간의 DMZ 기행,” 오랜만에 대하는 반가운 이름을 그곳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DMZ를 여행한 사람, 함 부장님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기억되어야 할 삶을 살아왔습니다. 지뢰와 철조망,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움직일 상대편의 감시와 총구, 곳곳에 남아 있는 전쟁의 잔해와 상흔, 화공(火功) 등 여전히 진행중인 갈등 속에서도 그래도 그 땅을 외면하지 않는 자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너무 쉽게 사라졌거나 너무 잘못 인식되고 있는 DMZ라는 이름의 땅에서 만나야 했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지닌 사람과 사람들, ‘여행’이라는 말이 결코 가벼움이나 낭만을 전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DMZ를 여행한 사람”이라는 말은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며 누구보다 분단의 땅을 온몸으로 사랑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걸음걸음마다 새겨져 있을 깊은 사랑, 스물세 살 군인 시절부터 반백의 오늘까지 분단의 아픔에 대해 그처럼 뜨겁고 숙명적인 사랑을 지니기도 힘든 일, 참으로 고유하고 은총 어린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누구라도 그 삶의 소중함을 공감하는 이들과 함께 마음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꺼이!
제가 이 책을 소중하게 읽게 된 데는 두 가지 개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책 속에 실린 사진입니다. 책을 펼쳐 드니 여러 장의 흑백사진부터 실려 있었습니다. 도무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게 만드는 철조망 너머 막막하고 무심하게 펼쳐져 있는 스크래치 풍의 풍경, 숨은 그림 찾기처럼 곳곳을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는 남대천의 금강산 철도, 구불구불 꿈틀대며 이어진 만리장성 같은 철조망 행렬, 아무 말 없이 다만 어머니 젖가슴을 닮은 정겨운 산봉우리 아래 어색하게 새겨진 커다란 선전문구, 말같이 생긴 궁둥이에 얼굴은 염소를 닮아 군인들이 말염소라고 불렀다는 눈 속의 산양들, 눈 속에 갇힌 동물들을 위해 철조망 너머로 통배추를 던지고 있는 한 병사의 평화로운 몸동작, 더덕 향이 가득 퍼질 것만 같은 숲속에 곤충의 더듬이처럼 은밀하고 집요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녹슨 지뢰의 선명한 뇌관, 모천을 찾아 회귀하느라 온몸이 다 풀어헤쳐진 듯한 연어, 사진 한 장 한 장이 이미 충분한 말을 하고 있어 처음부터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주는 낯섦과 아픔과 곤혹스러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의가 아니다 싶으면서도 책 속의 사진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기 전 사진부터 ‘읽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조국이 남과 북으로 허리가 잘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잘린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의 허리가 어떤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싶게 곳곳의 흑백사진들은 흑백사진만이 말할 수 있고 담을 수 있는 내용들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발견한 사진 한 장, 양쪽 페이지를 한 장의 사진으로 다 채운 커다란 사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진은 제 앨범에도 들어 있는 낯익은 사진이었습니다. 철원제일교회의 잔해 앞에 둘러서서 기도하며 찍은 사진, 여러 해 전 원주권의 젊은 목회자들이 우리나라의 성지를 순례하기로 하고 첫 번째로 떠난 곳이 철원과 화천 등 분단지역이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김정권 목사, 오명동 목사, 한석진 목사, 김창연 목사, 이상훈 목사 등 당시 동행한 그리운 얼굴들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서 계신 분 중에는 어처구니없이 묻힐 뻔한 순교의 역사와 당시 교회의 터와 신앙유산을 찾는 데 앞장섰던 이금성 장로도 계십니다. 그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저 자신임을 확인하니, 당시 기도를 드릴 때의 심정이 그대로 살아오는 듯싶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제안하고 앞장서서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함 부장님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양떼를 외면할 수가 없어 기꺼이 죽음의 땅을 되찾아 들어가 죽기까지 양들과 함께 있었던 이 땅의 진정한 목자들. 개신교 역사 속에 그처럼 뜨거운 순교의 순간과 현장이 있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을 목회자들이 너무도 모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함께 둘러보기를 권했던 시간, 우리는 그때 뜻밖의 1박 2일을 보내며 거룩한 땅 성지가 우리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책의 내용이 특별하게 와 닿았던 것은 아버님과 관련되어서입니다. ‘새카맣게 강을 메운 연어 떼 때문에 툭하면 나룻배가 강 한복판에 갇히기 일쑤였다’고, ‘가을 손님에겐 두 마리 연어 국을 끓여주는데 강바닥에 부둥켜안고 있는 두 마리의 연어를 쇠쿠리를 뒤집어 씌워 잡아오면 되었기 때문’이라고, 책 속에서 눈가에 이슬이 맺혀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신 김희준 씨의 고향은 고성 적벽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제 아버님의 고향은 고성군 통천면 벽양리, 적벽과 벽양과의 거리가 얼마쯤인지는 모르겠으나 김희준 씨의 고향 이야기는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아버님의 고향 이야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꿈에도 그리시다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신 아버님의 아픔을 헤아리며, 어쩌면 내 고향 또한 아버님이 두고 오신 금강산 자락 그 어디일 거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내게 책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가 박수근에 얽힌 이야기 또한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박수근 내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친자식처럼 여겨 주시던 분이 순교자 중의 한 분이신 한사연 목사님이었다는 것, 박수근의 질박한 그림 속에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함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의 정서를 놀랍도록 단순하고 어색함 없이 표현했다 싶어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박수근의 그림을 앞으로는 더욱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피난길에 김화 어느 곳인가 묻었다는 박수근의 그림 500여 점이 담긴 항아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소중한 그림이 이 땅 어디엔가 묻혀 있어 이 땅이 더욱 아름다운 땅이 될 수 있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모두가 꿈꾸는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이 서로 통하는 길을 닦다가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 그림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땅 백성들의 순수한 정서를 사랑했던 한 화가가 우리의 본래 표정은 이런 것이었다며, 마침내 하나 되는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값진 선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지뢰를 살아서 진화하는 지능을 갖춘 고등생물로 바라보며 지뢰가 심긴 밭을 ‘민들레 벌판’이라 부르고 있는 것도 그랬고, 단장의 능선과 어은산 산줄기 사이 수입천이 휘감고 있는 개활지 문등리에 얽힌 이야기도 그랬습니다. 본래 그곳은 문둥이촌이었고, 전쟁 중에 그 마을을 군사기지로 위장해 놓아 전투기의 공습을 유도했다는 것, 그때 불쌍한 문둥이들이 물로 뛰어들어 눈이 빨갛게 충혈 된 물고기로 변했는데, 눈이 새빨갛다고 하여 군인들이 ‘김일성 고기’라고도 불렀다던 그 물고기가 바로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였다는 사실도 그랬습니다.
별똥별이 떨어진 자리라고 믿으며 한평생의 삶을 걸고 지뢰밭을 옥토로 바꿔간 해안분지의 사람들, 그들이 지뢰밭을 옥토로 바꾸자 뒤늦게 땅 주인이 나타나 결국 땅의 소유권을 빼앗기고 자식들을 소작농으로 만든 한을 품고 떠난 일명 펀치볼 사람들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만큼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대암산 용늪도 그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조용히 일러주는 흥부새 이야기와, 한겨울에도 새들의 날갯짓으로 얼음이 얼지 않는 교토 저수지도 그랬습니다. 패장인 자신을 더 이상 따르지 말라며 홀로 한탄강을 건너간 궁예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고, 잃어버린 왕궁터 궁예도성이 천년 뒤에 그어진 남과 북의 DMZ 군사분계선 양쪽 끝에 기하학적으로 기가 막히게 걸쳐 있다는 사실도 그랬습니다. 연어의 행로를 뒤쫓다 만나게 된 쿠릴 열도의 파라무셔 섬의 김씨와, 1944년 파라무셔 섬 앞에서 격침된 일본 수송선 다이베이마루 호와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는 대목은 더욱 그랬습니다.
막연하게 ‘전쟁이 끝난 땅’, ‘아무것으로도 무장되지 않은 땅’, ‘자연의 보고’로만 알고 있던 DMZ는 그렇게도 아프고 슬픈, 슬퍼서 아름다운 사연들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침묵하며 벽처럼 닫혀 있던 향로봉산맥을 넘어가 보면 연어 떼가 치닫는 남강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고, 오래된 아름다운 성이라는 뜻을 가진 고미성(古美城) 성터가 있다는 이야기가 책을 덮는 순간 더 이상 전설로만 들리지가 않습니다.
지뢰가 깔린 민들레 벌판에 한 그루의 평화 나무를 심자고 말하는 이가 있는 한, 지뢰가 갖고 있는 ‘오증저분도보(오해, 증오, 저주, 분노, 도발, 보복)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화용관질인희(화해, 용서, 관용, 질서, 인내, 희망) 백신’을 만드는 꿈을 가진 이가 있는 한, 무너진 노동당사 건물에 한반도기가 그려진 수십 장의 손수건을 내거는 이가 있는 한, 한국의 DMZ를 평화의 텃밭으로 만들자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있는 한,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이 시집 온 이웃 새댁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보기 좋을 뿐 아니라 시부모에게 효도를 잘할 것 같다고 칭찬을 한다거나, 달 밝은 밤 동네 청년들이 모여 혼자 사는 할머니네 논일을 몰래 도와줄 때, 의좋은 형제가 서로 볏단을 지게에 지고 몰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옮기고 있을 때’ 고미성엔 사람은 볼 수 없는 쌍무지개가 뜰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남강과 명파천을 찾아 어린 연어를 먼 바다로 떠나보내는 어린 손길들이 이어지는 한, 연어 떼와 장수하늘소와 고미성 이야기는 더 이상 전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 한 소년의 입을 통해 스스로에게 들려주었던 당부를 다시 한 번 함 부장님께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눈물과 아픔이 깊이 배인 분단의 땅을 뜨거운 사랑으로 더듬으며 한평생을 살아오신 한결같은 삶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 혹은 위로가 가득 담긴 마음의 인사이기도 합니다.
“DMZ를 행복하게 만들어 보세요. 당신은 그 방법을 알고 있어요. 이 세상에 당신만큼 오래 DMZ를 여행한 사람이 없잖아요.”
<기독교사상> ‘책에서 길어올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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