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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시선-돈詩] 귀여운 채귀(債鬼)- 도화(陶畵) 1
귀여운 채귀(債鬼) - 도화(陶畵) 1
사슴이 삼(蔘)꽃을 먹고 덤불에 숨어 똥을 눈다.
똥 속에 섞인 삼(蔘)씨가 뿌리를 내린다.
휘두른 귀얄 자국 위에 애기 손바닥 같은 삼(蔘)잎이 돋아난다.
이 귀여운 손바닥은 빚 갚아라, 빚 갚아라, 재촉을 한다.
몇 세기(世紀)를 두고도 갚지 못할 빚을-.
어쨌든 빚 갚아라, 빚 갚아라, 재촉을 한다.
인제는 씨도 뿌리도 다 말라버렸는데 그날의 삼(蔘)꽃은 언제 피나?
- 김상옥(1920∼2004)
악착(齷齪)같이 아귀(餓鬼)같이 독촉하는 빚쟁이가 ‘채귀’다. 옻칠을 하거나 풀을 바를 때 쓰는 붓이 귀얄이고 그 붓질 자국이 ‘귀얄 자국’이다. 어느 도공이 돼지털 말총 귀얄에 백토 반죽을 듬뿍 찍어 도자기에 휘두르듯, 봄을 위해 어마어마한 귀얄을 휘둘러 이 땅에 기운생동한 귀얄 자국을 내는 이 누구인가. 그 고랑에서 사슴이 삼꽃을 먹고 똥을 누면 그 똥 속에 섞인 삼씨가 뿌리를 내려 애기 손바닥 같은 삼잎이 돋거늘, 삼삼한 소색임(속삭임)으로 빚 갚아라, 빚 갚아라 재촉하는 삼잎이 바로 채귀다. ‘몇 세기를 두고도 갚지 못할 빚’이라니 자연의 빚이고 계절의 빚이고 시간의 빚이겠다.
생생 돋는 삼잎에게 봄날의 삼라만상은 다 채무자다. 비, 바람, 햇살이 삼잎에게 알랑 떠는 이유다. 이 빚 재촉은 “심봤다!”며 절 받았던 언젠가의 산삼뿌리가 꿔줬던 원금 탓일 것이다. 한두 세기 지나 귀한 삼뿌리가 될 심산에 더 독촉일 것이다. 요렇게 귀하고 귀여운 채귀들이 우후죽순하는 봄의 빚이라면 파산 직전의 만성채무자여도, 회생불능의 신용불량자여도 좋겠다. 삼꽃도 사슴도 삼잎도 없이, 마이너스통 장과 카드 할부와 융자 빚의 재촉만이 울울창창한 이 봄날에는 더더욱.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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