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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집, 한 우물 파기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57 추천 수 0 2022.10.10 08: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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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집, 한 우물 파기
진하 형,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말이어서 어색하게 느껴집니다만 격조했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네요. 정말 오랜만에 소식을 드립니다. 오랜만에 불러도 형의 이름은 변함없이 친숙한데 형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간간이 형이 쓴 책을 만나기도 했고, 글을 읽기도 했던지라 멀리 있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문득 형을 부르고 나니 머쓱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멀리 떠나 살다가 이제 시차가 없는 곳으로 돌아왔으니 언제고 시간이 주어질 때 자연스레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천이었던가요, 형이 강릉 쪽에서 목회를 할 때 그곳에서 저녁예배를 같이 드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그리움으로 떠오릅니다. 시(詩)가 사원(寺)의 언어(言)일 수 있다는 말을 그 때 들었지 싶습니다. 침묵을 지향하는 언어, 목수가 나무를 다듬듯, 도공이 흙을 빚듯 형은 언어를 빚고 있었어요.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에서 형이 노래한 빈들의 아픔과 슬픔 속엔 제가 단강에서 일상처럼 만나는 이웃들의 막막한 상처들이 고스란히 속살처럼 담겨 있었지요. 남모르게 간직한 슬픔을 들킨다는 것은 부끄러움이기도 하지만 위로이기도 했습니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동안 형의 시를 읽으며 받은 위로가 적지가 않았음을 이렇게 뒤늦게 고백합니다.
아는 이의 추천으로 책 한 권을 읽다가 형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미련해 보일 정도의 고집을 대하면서 형이 생각났습니다. 형과 마음을 나누며 가까이 지내는 기석 형이 언젠가 형을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요. 시에 쓸 단어 하나의 적절함을 확인하기 위해 두툼한 책을 기꺼이 읽는 사람이 형이라 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정직한 시 하나를 위해 형이 바치는 땀방울을 적절하게 드러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독자에게 타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서는 들머리에 있는 한 한국식당에서 경험한 일을 칼럼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그 식당에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액자가 벽에 가득 걸려 있습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음식을 먹은 소감을 쓴 것을 주인이 액자에 담아 걸어둔 것입니다.
액자에 적힌 이름을 보면 내로라하는 이름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장관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이며, 대기업의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들, 이름난 대학의 학장과 교수들, 화가와 작가 등 예술인들의 이름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글을 써 준 이들은 외국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듯하고, 식당은 식당대로 홍보효과를 볼 일일 테니 서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듯합니다.
하루는 그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벽에 걸려있는 글을 읽게 되었는데, 액자 하나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고 정겹습니다.”
전임 국무총리가 남긴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불편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이내 짚이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동석한 중학생이 있어 그 글을 꼼꼼하게 읽어 보라 하고 느낌을 물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학생이 대답을 했습니다.
“저렇게 쓰면 한국에 사는 분들이 화내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런 점이 아쉬웠습니다. 아무리 외국에 나와서 한인식당을 찾았다 하여도, 그리고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동포를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글 한 줄을 기분 좋게 남긴다 하여도 가려 써야 할 말은 가려 써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 글은 한국에 사는 이들과 외국에 나와 사는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교하고 있었고, 외국에 사는 이의 편을 너무 쉽게 들어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설령 정말로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하여도 공인으로서 그런 글을 남기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었지요. 사소한 일을 괜히 트집 잡는다 할지 몰라도 그 글은 이렇게 써야 옳았겠다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먹는 것처럼 맛있고 정겹습니다.”
‘보다’와 ‘처럼’의 차이가 무엇 그리 클까만 그래도 그런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아는 지도자가 국민의 심정을 보다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럼을 읽은 한 독자가 글의 내용이 불편했던지 ‘目四’라는 필명으로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습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나도 봤는데 이런 식으로 매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코멘트를 해준 국무총리도 상기 글처럼 '더 맛있다'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다만 해외에서 열심히 살면서 우리 음식을 만들어내니까 '처럼, 보다'를 가리지 않고 '더 맛있다'란 의미로 써준 것일 것이다. 글 중에도 '사소한~' 사족이 붙어 있지만, '직업'이 '목사'인 글쓴이는 아마도 '目四'의 혜안을 갖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고등학교 때 본 국어시험 문제 중 지금도 생각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제시하며 소월과 두보의 시세계를 구별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시 중에서 찾아 설명하라는 문제였습니다. 정답은 ‘저만치’였는데 자연과 자신을 일치하느냐 관조하느냐가 두 시인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단어 하나로 시의 거장이랄 수 있는 두 사람의 시세계를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등학생인 내게 얼마나 신기하게 다가왔는지를, 지금까지도 그 문제를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을 통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독일의 한 식당에서 생각한 ‘보다’와 ‘처럼’의 차이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것이 정말로 사소한 차이였는지 나는 지금도 하나의 생각거리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형, 이번에 제가 읽은 책은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우리에게 정겹고도 선명하게 남은 이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던 한창기 씨의 글을 모아 엮어낸 책입니다. 잡지도, 글을 쓴 이도 어쩌면 저보다도 형에게 더 익숙한 이름이겠다 싶습니다.
평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지 않아 우리말과 관련된 책이나 글을 눈여겨왔던 터이지만 이 책을 읽기는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말과 그 쓰임새에 대한 생각과 관심이 애정을 지나 집요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이렇게도 깊고 세밀할 수가 있는 거구나, 책을 읽는 동안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내내 찬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은이는 우리말이 일본말로 동화되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교육, 방송, 광고, 패션, 산업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일본문화를 돌아보며 문화적인 노예가 주인에게 가장 잘 복종한다고 지적할 때, 그 지적은 아픈 만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철공소’가 되어버린 ‘대장간’, ‘정미소’가 되어버린 ‘방앗간’, ‘식당’이 되어버린 ‘밥집’, ‘양조장’이 되어버린 ‘술도가’, ‘서점’이 되어버린 ‘책방’, ‘정종’이 되어버린 ‘청주’, ‘지하철’, ‘고속도로’, ‘대통령’, ‘그녀’, ‘-해마지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그 모든 말들이야말로 우리말이 일본말로 동화된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우리말에 침식하는 일본식 표현은 거기에 해당하는 우리의 토박이 표현을 죽이거나 약화시키며, 일본식 언어 습성이 우리말 속에 번짐은 우리말 속에 잠재해 온 말의 논리를 파괴시키는 것인데도 우리는 ‘일본화된 병신말’을 한국말로 오해하며 마치 그것이 본래부터 우리말이었던 것처럼 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미말(모국어)은 ‘그것이 없이는 한순간이라도 지내기 어려울 만큼 필수적인 요소’인데 우리말을 너무 쉽게 내주고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으니 그 병세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글쓴이가 보여주는 우리말과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에는 존경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어릴 적 흔한 놀이였던 제기의 종류만 해도 땅제기, 들제기, 양발 제기, 키제기, 물제기, 일제기, 갈제기 등 그 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뜬모, 도사리, 호미굴, 중벌매기, 공벌매기, 알거름, 맘매기 등 모를 심고 돌보는 것과 관련된 말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을 집중해서 한참을 살펴도 헛갈리곤 하는 형용사와 동사와의 형식적인 관계, 쉬운 듯 어려운 글말과 입말의 관계,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국인의 감정 속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표현이 되는지, 사랑한다는 말과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누가 누구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대부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때문’과 ‘까닭’이 서로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기에 구별해서 써야 한다는 것, 우리가 대통령 연설에서 흔히 들었던 ‘본인’이라는 말이 서푼어치 체통 때문에 나온 자기 높임말이라는 것.... 우리의 언어 습관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는 대목들도 책에는 적지가 않았답니다.
예수교와 관련된 지적들도 있어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교회에서 그 중 흔하게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지은이는 기독교 목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의 목사들은 무척 인색하게 배포해야 할 사랑을 다른 사람들한테 주라고 신도들에게 외치는 대신에, 남에게서 ‘정다움’을 발견해서 그에게 정을 주라고 외쳐야 한다. 이처럼 주는 정이 <성경>의 가르침에서의 ‘사랑’에 해당한다.”
형이 얼마나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쓴이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감정과는 달리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말의 성격으로 봐서 그런 말을 하고 생색을 내는 것 자체가 합당한 일이 아닐 뿐더러, 누가 굳이 해야 하겠다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나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름은 그 뜻이 지칭하는 대상의 몸에 맞아야 하는데, 그 하는 일에 견주어 그 뜻이 너무 크면 진정성을 잃어버린다는 지적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흔해진 만큼 그 말이 갖는 의미는 모호해지거나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겠다 싶습니다.
형,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충분한 생각 없이, 분별력 없이, 고민 없이 너무 그럴듯한 말들을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하다 보니 어느 새 목회자의 말은 하나의 상투적인 말투와 형식과 내용으로 자리를 잡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딴 나라 말처럼 통하기 힘든 말이 되고 말았고, 장단고저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움직이는 힘을 지니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목사들이 목사의 설교 듣기를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이런 사정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지 싶습니다.
내가 쓰려고 하는 단어 하나를 두고 그 적절성을 확인하기 위해 두툼한 책 한 권을 기꺼이 읽었던 형의 그 노력과 마음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숨이 막힐 것처럼 전해져오는 한창기 씨의 열정이 왜 우리에겐 부족한 것일까요. 정리한 생각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찾고, 살아있는 표현을 위해 수없이 문장을 다듬는다면 우리의 말은 한결 간결해지고 명료해지고 살아있게 될 텐데요.
책을 읽은 내게 한창기 씨와 형은 한 고집으로 한 우물을 판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책 한 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말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처럼 다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문득 간절해집니다.
<기독교사상> ‘책에서 길어올린 풍경’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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