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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를 묻게 될 때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79 추천 수 0 2022.11.04 11: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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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를 묻게 될 때
홍장로님, 먼 길 출장 중인데 건강하게 일 잘 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아 제 마음도 불편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평온한 가운데 좋은 성과를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잠도 못 자고 비행기에서 내렸다며 보내주신 메일을 통해 왜 전통적인 목회자들이 목회자=하나님이란 공식을 사용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하셨지요.
비행기 안에서 일간지를 보며 읽은 것이라며 소개한 글을 통해서도 장로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다른 피조물들을 이렇게 만들라 혹은 저렇게 만들라고 못살게 굴거나 만들지도 말라고 요청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가볍게 웃어넘기기에는 신앙인들의 알량한 모습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언젠가 목회하는 후배가 저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목회하며 어떤 것이 가장 힘이 드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사는 것이 힘이 들지 목회가 무엇 따로 힘들겠냐고 즉답을 피하자 후배는 거듭 제 생각을 물었고, 그 때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대답을 했던 것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소하달 수 있는 그 이야기가 여태껏 남아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채 목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뿐더러 참으로 허망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분명해집니다. 목회의 길이 사람에 대한 실망, 그것도 지독한 실망 앞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도 갈수록 실감하게 되면서요.
장로님, 요 며칠 저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자기의 경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와는 또 다르게 다가오는 증언이었습니다.
내용이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결코 빠르게 읽을 수가 없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가 얼마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가가 지켜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차분함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격한 감정을 격한 말로 쏟아놓아야 할 순간임에도 그의 목소리나 감정은 높아지거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극도로 절제하며 걸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 당시 상황을 더욱 생각하게 되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의 글 속에 감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그 순간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선택인 것도 같았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것이 인간인가)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 때 심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 그렇지만 노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나의 이런 태도가 무분별한 용서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길 바란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절제된 언어로 증언할 뿐 심판을 증언을 듣는 이들에게 맡기고 있는 그의 차분한 태도는 무서울 만큼의 진정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은 그의 마음과 상황을 헤아리느라 여러 번 책읽기를 멈춰야 했으니까요.
아우슈비츠는 널리 알려진 대로 죽음의 수용소였고, 그 이상이기도 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책의 서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자궁이 차디찬 이가.’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굴뚝뿐이었습니다. 샤워실인 줄 알고 알몸으로 들어간 가스실을 거쳐 소각장의 연기로, 무(無)속으로 사라지는 것뿐이었지요. 아무리 처리대상 인원이 많을 때에도(아우슈비츠는 1944년 8월의 단 하루 동안 2만 4천명의 포로가 사망했다는 초유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기로 사라지는 것까지의 모든 과정이 3시간을 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머리카락은 매트리스와 천 등 군수용품을 만들기 위해 베어졌고, 화장시킨 사체의 재는 가까운 하천에 버려지거나 비료로 사용이 되었고, 희생자의 금니 등은 모두 분리가 되었습니다.
운 좋게도 바로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은(이송되어 온 사람들 중 중노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 70-80퍼센트가 명부에 등록되지도 못한 채 곧장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젊고 건강한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노동을 통한 멸절’ 정책에 의해 추위와 극도의 배고픔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한순간에 생과 사가 갈리는 ‘선발’을 거쳐 연기로 사라졌습니다.(수용소에서 수인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3개월이었습니다) 그들은 죽는 방법이 조금 다른, 회색기계의 부품일 뿐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인간의 언어로는 그런 모욕과 그런 몰락을 기록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생각과 기억까지를 포함한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고통과 생존의 욕구만이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으로 전락을 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Hier ist kein warum."(이곳엔 이유 같은 건 없어)라는 말이 대변하듯, 수용소는 이유가 없는 곳이었고, 질문이 불가능한 곳이었고, 대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깨어날 때의 날카로운 고통으로 하여 꿈을 꾸는 것조차 슬픔이 되고 마는(모인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긴 합니다. 꿈속에서도 그들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려는 자신을 억지로라도 억제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생존이 가능한,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불행할 수는 없어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되는 자살은 생각지도 못하는, 수용소는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였을 뿐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번호로 대체되는(프리모 레비의 번호였던 174517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졌습니다), 인정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럽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눈물겨운 일들이 수용소의 일상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만이 아니라 늘 가져왔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당시의 독인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말로 몰랐을까 하는 것이지요. 먼저 프리모 레비는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 몇 진지한 역사학자들의 겸손함을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원학적으로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쉽게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식하고 경계하는 게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나치가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강구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인들은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내 수용소였던 부헨발트의 생존자로 나중에 뮌헨 대학 정치학과 교수가 된 오이겐코곤에 따르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알고 있는 판사, 경찰, 변호사, 성직자, 사회복지사의 수가 수천을 헤아렸습니다. 독일의 많은 대기업이 포로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대학의 교수들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힘러가 만든 의학연구소와 협동 연구를 했고, 국가소속 의사와 개인 병원 의사들이 전문적인 살인자들과 협력을 했습니다. 많은 군인들도 곳곳에서 얼마나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었고,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직접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나는 모른다는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더 큰 죄에 동조할 수 있다는 그의 지적은 여러모로 깊이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내 경험은 내가 받았던 종교교육 중 그나마 남아있던 것을 거의 일소해 버리는 것과 같았다. 아우슈비츠가 있다. 그런데 신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이런 딜레마의 해결점은 아직 찾지 못했다. 찾고 있지만 찾지 못했다.’
신의 부재라고 정리할 만큼 절망의 시간을 보낸 프리모 레비는 무엇으로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있었을까, 그 또한 내내 제 관심을 끌었던 대목입니다.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이 아니라 꼭 살아남아 자신들이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마지막으로 밝히고 있는 이유가 제겐 가장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내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장로님, 부끄럽기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합니다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 큰 실망과 아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는 바로의 불같은 압제에는 한 마디 말도 못하다가 자신들을 이끌고 있는 모세에겐 불같은 불평을 쏟아놓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는 정당성의 근거로, 다른 이들에게는 부당성의 근거로 삼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아름다운 순명을 ‘yes man' 쯤으로 전락시켜 자신의 불충을 가리는 모습도 있습니다.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 첫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그 시는 제게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내 너무 주님 쳐다보아/ 주님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주님 이름 불러/ 주님 이름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시인이 노래하는 마음, 염치(廉恥)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때마다 실망과 아픔으로 다가오지요. 그렇지만 장로님, '이것이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일수록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리모 레비가 ‘내 동료들과 내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로써 암흑과 같은 시간을 이겨냈던 것처럼, 사람에 대한 버릴 수 없는 신뢰가 우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녀오시면 제가 차 한 잔 사겠습니다.
<기독교사상> *책에서 길어올린 풍경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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