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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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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진짜 행세를 하는 가짜는 많다
어떤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에 남아 있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라는 구절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니, 기가 막힌 역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감각함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엔소니 드 멜로 신부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 비겁한 용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혼여행을 간 부부가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막 침대에 들려는 순간 강도가 들이닥쳤습니다.
강도는 펜으로 바닥에 원 하나를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신랑을 불러 말했습니다. “이 안으로 들어가라. 한 발자국이라도 금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머리에 구멍을 내줄 테다!” 신랑은 강도가 그려준 원 안으로 들어가 꼼짝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강도는 방안에 있던 온갖 물건들을 자루에 쓸어 담았지요.
물건을 모두 챙긴 강도가 막 방을 나가려는 순간, 시트 한 장으로 알몸을 가리고 숨어 있던 신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강도는 다시 손가락을 까딱거려 신부를 부르더니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신부를 껴안고 키스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강도가 신부를 겁탈하려고 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신부는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강도와 싸웠고 깜짝 놀란 강도는 도망을 쳤습니다.
강도가 도망을 간 뒤 신부가 신랑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도대체 무슨 남자가 자기 아내가 욕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속수무책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자 신랑이 신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기만 했던 건 아니라구…”
“그럼 도대체 뭘 했단 말이에요?” 신부가 다시 따져 묻자
“놈에게 반항을 했지. 놈이 등을 돌릴 때마다 금 밖으로 발을 한 번씩 내밀었다니까…”
글을 읽다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는데, 이야기 끝에는 이 이야기를 한 줄에 정리라도 하려는 듯 다음과 같은 짧은 글 하나가 달려 있었습니다.
‘진짜 행세를 하는 가짜는 많다.’ 이 한 마디 말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했구나 싶었습니다.
신랑은 평생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뜨거운 맹세를 했지만 위기가 닥치자 신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신부가 자기 눈앞에서 큰 봉변을 당하는데도, 바라보기만 한 셈이었습니다. 낯짝이 뜨거워지도록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서도 강도가 보지 않을 때 발을 몰래 금 밖으로 내밀었다고 항변을 하니, 그런 신랑의 모습이 한없이 가볍고 우스꽝스럽기만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지, 오리무중입니다. 원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발을 밖으로 내미는 것을 무책임한 자신에 대한 위안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짜 행세를 하는 가짜가 많다는 말이 아프게 가슴을 찌릅니다.
한희철 <교자로>202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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