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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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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고들빼기와 씀바귀
먼 길을 찾아오신 선배 목사님이 정릉을 다녀가는 날이었습니다. 모처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영감이 연륜을 앞선다고는 하지만, 연륜은 여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힘든 빛나는 가치입니다. 은퇴를 하였지만 빛나는 통찰은 여전하셨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뒤 차에 오르려던 목사님이 주차장 앞 화단에 핀 꽃을 보고는 화단을 살폈습니다. 교우들이나 이웃들이 잠시 쉬어가는 화단에는 이런저런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몇 가지 꽃들을 살피시던 목사님이 내게 물었습니다. “한 목사님, 혹시 고들빼기와 씀바귀가 어떻게 다른지 아세요?”
이맘때면 어디라도 흔하게 피어나는 노란 꽃들 앞에서였습니다. 꽃의 빛깔이나 모양은 물론 꽃의 키도 달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구별이 되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모르겠다고 하자 목사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잎을 보면 알아요. 잎이 줄기를 돌돌 말고 있으면 고들빼기고, 삐죽 줄기에서 뻗어나갔으면 씀바귀랍니다.”
목사님은 금방 한 무더기 꽃 속에서 고들빼기와 씀바귀를 찾아 보여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고들빼기 잎은 한결같이 줄기를 동그랗게 말고 있었고, 씀바귀는 고들빼기와는 달리 줄기에서 삐죽하게 잎을 뻗고 있었습니다. 살펴보니 한 무더기 같은 꽃 안에도 고들빼기와 씀바귀가 섞여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다를 게 없던 꽃인데, 잎 모양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배웅을 마치고 배운 것을 새기듯 다시 꽃들을 바라볼 때, 사소한 것이 서로를 구분 짓게 하는 것이 어디 고들빼기와 씀바귀뿐일까 싶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다른 이들의 삶과 구분 짓는 것도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이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이겠지요, 눈길은 이내 꽃양귀비에게로 갔습니다. 대접을 받는다는 듯이 꽃양귀비가 화단 중심 부근에 피어 있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양귀비는 키우면 큰일이 나는 꽃이었습니다. 비상약으로 쓰려고 키운다는 말과는 달리 마약 성분이 있다고 하여 철저하게 단속을 했습니다. 화려함 속에 서로 다른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 준 꽃이 양귀비였습니다.
주변에서 꽃양귀비를 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눈부신 빛깔은 물론 햇빛의 농담(濃淡)까지를 담아내는 잎이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꽃양귀비를 보면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꽃양귀비 속에 진짜 양귀비를 섞으면 구별이 될까 싶은 걱정이었지요.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고들빼기와 씀바귀가 그랬던 것처럼 관상용 양귀비와 마약용 양귀비를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하고 분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양귀비는 줄기와 꽃봉오리에 털이 없어 매끈하지만, 꽃양귀비에는 온통 잔털이 돋아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비슷해 보여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구분이 됩니다. 모두가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하는 것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교차로>20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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