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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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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495. 영정사진 찍어드리기
어느덧 단강교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지워질 듯 사라질 듯 위태했던 시작이었지만 어느새 10년, 우리는 갓난아기의 티를 벗게 되었다. 창립 10주년을 어떻게 기념할까 하다가 생각한 것이 ‘영정사진 찍어드리기’
사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었다. 마을 사람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느꼈던 일이지만 마땅한 사진이 없어 곤란함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갑자기 돌아가셔 (사실 누구의 죽음인들 의외성에서 벗어난 죽음이 있을까만) 영정으로 쓸 사진을 찾아보면 마땅한 사진이 없는 경우가 많아 그중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을 급하게 확대해 쓰는 일이 많았다. 그것도 없는 경우엔 여러 사람과 찍은 사진 중 고인의 얼굴을 찾아 확대하든지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는 사진을 확대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죽음이나 장례를 남의 일로, 먼 훗날 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노인분들껜 늘 준비해야 할 일. 당연히 영정사진에 대한 생각도 젊은 사람과는 다르기 마련이었다.
겨울철에 동네를 찾아와 초상화를 그려주는 이에게 1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주고서라도 당신 모습을 액자에 담아 걸어둔 것은 언제일지 모르는 당신의 떠남에 대한 나름대로의 큰 준비라면 준비였다. 값도 비싸고 얼굴 모양도 어색하지만 그런 것이라도 미리 준비해 둬야 떠나는 마음이 편할 일이었다.
교우들과 의논을 하여 사진 찍어드리기 행사를 준비했다. 여선교회에서 떡과 차, 칼국수를 준비했다.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을 정성껏 대접하기로 했다. 사진 찍는 일은 동생 한희진 집사에게 부탁을 했다. 인켈 홍보부에 근무를 하고 있어 사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고, 마침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분과 올 수가 있다 하여 약속을 했다.
보건소장인 유보비 집사님을 통해 알아보니 마을에 환갑 지난 분이 80여명.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이왕 하는 것 좋은 사진으로 찍어드리고 싶데 예산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편히 접기로 했다. 언제라도 결정적인 모자름은 결코 돈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기로 한날 동생과 ‘디오 스튜디오’ 문효덕 실장이 차에 장비를 가득 싣고 내려왔다. 우산처럼 생긴 조명 기구와 배경 천 등을 설치하니 예배당이 사진관이 되었다.
양복을 입고 온 분도 있었고 한복을 입고 온 분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먼저 찍은 사람에게서 두루마기와 한복을 빌려 입고 찍기도 했다.
‘영정사진’, 말이 갖는 어둑하고 무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사진 찍는 분위기는 밝고 따뜻했다.
“웃어, 어여 더 크게 웃어!”
카메라 앞에선 어색함을 그렇게 서로들 지워냈다. 사진을 찍고는 떡과 칼국수를 나누며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나절이 걸 려 마흔 댓분이 다녀갔다. 몸이 아파 거동이 불편한 분은 차로 모시기도 했다.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오지 못한 분들이 있는 게 서로 아쉬웠다.
사진을 다 찍고 수고한 문실장과 동생과 앉아 잠깐 얘기를 나눴다.
“사실은 저도 모태신앙인이랍니다.”
문실장의 고백 속엔 작은 사골을 찾아와 노인분들 영정을 찍어 드린 하루의 시간이 모처럼 맛본 보람 있는 시간이었노라는 마음이 다 담겨 있었다.
다음날 동생에게 들으니 그들은 밤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한다. 사랑이란 그렇게 남모르는 수고를 통해 구체화 되는 것이었다.
이름다운 꽃이 열심히 물을 찾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땀 위에 있는 것처럼.
(얘기마을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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