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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 인우재(?愚齋)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5289 추천 수 0 2002.01.05 2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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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548. 인우재(?愚齋)

 

떨어져 나뒹구는 긴 머리카락처럼 마음대로 휘어 늘어진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색하게 비뚜로 놓인 다리 건너 문을 닫은지 오래된 방앗간이 나온다. 서툴게 그려진 여자 나신의 빛바램 만큼 흙과 짚이 엉성하게 풀리고 있는 방앗간이다. 

방앗간 바로 앞에는 몇개 바위가 그럴듯이 모여 물을 담고 있는 개울이 있다. 한여름이면 아이들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여서 지금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어렸을 적에도 지금 자기 자식들이 하는 그 모습 그대로 물놀이를 하던 곳이다. 

바위가 없어지지 않는 한,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아이들이 이 땅에 사는 한, 그 모습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것이다. 

조금 더 오르면 지난 겨울 화재로 불타버린 버섯장의 잔해가 시커먼 모습으로 앙상하게 서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실핏줄 나눠지듯 서너개 길이 나눠진다. 

머리 헝크러진 노인이 혼자 사는 기울고 낡은 집 쪽으로 들어서면 거기가 버스 종점이다. 의자 하나, 가게 하나 없는 막막한 종점, 아침과 저녁 잊지 않고 버스가 들어와 가쁜 숨 잠깐 돌리곤 돌아나가는 곳이다. ‘종점’이란 말의 쓸쓸함을 닮았는지 버스는 대개 빈 채로 들어와 빈 채로 나간다.

 

버스 종점에서 북쪽을 보면 특별한 게 없다. 집도 없고 전봇대도 없고 훤한 길도 없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산이 있고 산 빛깔을 닮은 논과 밭들이 낮게 드려 있을 뿐이다. 그 길로 들어서는 길은 비포장이다. 그리고 엉망이다. 이따금씩 경운기가 오가고 트럭이 오가지만 길은 비가 임자라 비 한번 오면 빗물이 흘러간 대로 길이 바뀐다. 

호시탐탐 길을 넘보는 풀을 피하며 걷다 보면 구멍 숭숭 뚫은 검은 망이 주저앉듯 쳐 있는 웅덩이를 지나게 된다. 메기를 키우고 있는데 망은 새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다.(하늘을 나는 것이 땅에 관심을 두다니!) 새의 눈을 가리나 마나 이젠 값이 똥값이라 어디서나 메기 열마리에 만원씩이다. 

실개천을 폴짝 뛰어 스무 발짝쯤 가면 길 복판에 고여있는 물을 만난다. 가만 보면 물은 고여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연신 퐁퐁퐁퐁 잔모 래를 밀어 올리며 물이 솟아난다. 길에 샘이 박혀있다. 경운기에 밟히고 소 발자국에 밟히고 논어서 뽑아 던진 피에 덮여도 물은 여전히 맑고 차게 솟는다. 

노을빛 닮은 사과들이 보기 좋게 달린 과수원이 이내 나타나는데, 과수원 경계로 친 철조망을 따로 왼쪽으로 올라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서면, 대개는 입이 떡 벌어진다. 

 

세월을 잊고 선 장한 느티나무, 그 품이 여간이 아니다. 설마 그만한 나무가 무심코 걷던 길 바로 위에 있으리라곤 누구도 짐작을 못한 터라 가던 길을 멈추고 장한 품을 감탄으로 마주하게 된다. 

단오날이면 어김없이 그네가 걸리고 왁자지껄 요란한 흥겨움이 펼쳐졌는데 이젠 모두 지난 일, 지난 그리움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한쪽 굵은 가지가 번개에 맞아 주저앉아 내렸다. 

새들이 들어 새끼를 치는 군데군데 나무 구멍 어디에선가, 혹은 평바닥에 나뒹구는 가지속 어디에선가 나무만큼 나이를 먹은 구렁이가 지나는 누군가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느티나무 그늘을 벗어나 짧은 비탈을 올라서면 저만치 서쪽 끝으로 봉긋한 봉우리가 마주한다. 여인의 예쁜 가슴을 닮은 봉우리가 아늑한 골짜기 사이로 솟아있다. 

봉우리를 바라보며 경사진 길을 따라오르다보면 길 왼편 경사진 방 한가운데 선 감나무가 보인다. 팔순 노인이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감나무는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가을이면 한껏 벌린 품에 주먹만 한 감을 무겁게 달아낸다. 서글한 할아버지 인상을 닮아 서글서글한 감들. 그러고 보면 나무도 사랑과 교감(交感)하여 산다. 할아버지와 친해진 나무가 말없이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위론 다시 가파른 길, 그러나 잠깐이다. 그런대로 숨 가쁘게 길을 오르면 높다랗게 양쪽으로 선 밤나무 가지 사이로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숨어 있듯 있는 집, ‘인우재’(?愚齋)다 ‘이웃 린’에 ‘어리석을 우’가 합해졌으니 ‘어리석음과 가까운 집’이란 뜻 일텐데, 생뚱스럽게 어리석음과 가까워지다니. 영악해져도 살기 힘든 세상에 스스로 어리석어지다니. 

흙과 나무와 돌로 선 집, 구들이 놓인 방바닥에 짚으로 만든 멍석이 깔렸고, 창호지를 바른 문으론 맑은 빛이 스며든다. 전기도 없어 천상 촛불을 밝혀야 한다. 온통 불편한 집. 그러나 뒷마루엔 은파처럼 별들이 일렁이고 풀벌레는 아무런 긴장감 없이 울어댄다. 

마음속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의 허위와 광기 내려놓고, 그 초라함과 가엾음음에 마음껏 우는 집, 문간 사이를 지나는 솔향 섞인 바람에 잠에 빠져들며 모처럼 숨이 고른 집, 한 지상의 끝인 듯 봉긋한 주봉 아래 안골엔 집이 하나 있어 두고두고 어리석음을 배우려 한다.

(얘기마을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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