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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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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679. 은총의 시간
여천동부교회(이필완 목사)에서 열린 말씀잔치 둘째날 낮 모임을 마친 뒤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목회자들이 숙소에 들렀다. 세 시간 가량 차를 타고 온 후배도 있었다. 함께 예배에 참석해 주는 동역자들 모습은 때마다 여간 미더운 일이 아니었다.
숙소를 찾아준 후배 중에는 김용태 목사도 있었다. 여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순천에서, 왕지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대학교 때 운동을 좋아하고 잘해, 그리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내지 못했지만 운동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김 목사는 오후에 시간이 괜찮으면 자기가 주변을 안내하고 싶다고 제안을 했다. 마침 그곳이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라는 것이었다. 기꺼이 나서기로 했다. 김 목사의 승합차를 같이 타고 먼저 봉화산으로 갔다.
임진왜란 때 봉화를 피워올려 봉화산이란 이름을 얻었단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험했지만 그래도 거반 정상 부분까지 차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산책 삼아 걸으면 좋은 길로 여겨졌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걸어올라 얼마쯤 올라가니 이내 정상이다.
돌계단을 오르자마자 오른쪽으로 탁 터진 바다가 보이는데, 그때부터 시작된 감탄사는 산에서 내려오도록 나도 모르게 계속 터져 나왔다. 섬과 바다가 너무도 아름답게 어울려있었고, 곳곳이 양식장인 바다 위론 겨울날씨 답지않은 오후의 햇살이 은가루처럼 반짝거렸다. 동해의 망망대해나 서해의 갯벌에서 보고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이 섬에서 섬으로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봉화산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었다. 돌로 쌓아 올려 만든 제단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김 목사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 주었다. 산 아래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이 김 목사가 태어난 고향이었으니, 김 목사의 고향 뒷산에 올라온 셈이었다.
저 아름다운 바다에서 자맥질을 하며 자랐다니, 김 목사의 유년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서울 냉천동 학교에서는 ‘촌놈’이라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김 목사는 ‘도시놈’들이 알지 못하는 은총을 어려서부터 마음껏 누리며 자라났던 것이다. 연신 웃는 그의 웃음이 더욱 해맑게 느껴졌 던건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변을 소개하던 김 목사가 자기는 지금도 마음이 답답하면 봉화산을 찾아와 봉화대 위에 무릎 꿇고 기도를 한다는 말을 했다.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탄을 남발하던 나는 김목사의 말을 듣고 다시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급한 상황을 가장 빠르게 알렸던 봉화대. 봉화대 위에 꿇어앉아 드리는 기도는 봉화만큼이나 간절한 기도 아닐까. 봉화대에서 드리는 기도보다 간절한 기도가 어디 흔하겠는가.
“여긴 너의 성소(聖所)구나!”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곳에서 귀한 믿음 지켜가는 김 목사의 모습에 감탄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시신을 맡겨 소멸시키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풍장(風葬) 풍속이 남아 있다는 조발도도 보고(그곳에서는 풍장을 ‘채빈’이라 부른다고 한다) 오후 한나절을 김 목사와 함께 즐겁게 보냈다.
여름에 가족들과 함께 꼭 오되 시간만 준비해서 오라는 김 목사의 청이 더없이 살갑게 느껴졌다. 저 아름다운 바다를 혼자 가슴에만 담기에는 너무 아깝다 여겨졌고 가족들한테도 미안한 일로 여겨졌다. 꼭 다시 찾고 싶었다.
숙소에서 잠을 잘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나서길 정말 잘했다. 그 아름다운 바다를 안고 왔는걸! (얘기마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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