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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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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708. 최선을 다하는 삶
감리교 부흥단 연수원엔가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에 다녀왔다. 전국의 각 지방이 참여하는 목회자 체육대회였다. 대회의 성격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래 (흙벽돌을 찍고 말리는 일을 며칠 계속했더니 오른쪽 손목에 통증이 심했다. ‘작업 품’이라던가 찻잔을 들 때도 찌릿찌릿할 정도였다)
참석 안했음 싶었는데 교역자 월례회에서 참석하기로 결정이 났다. 천상 배구에선 주공격을 맡아야 하는데 걱정이었다.
몇 번 모여 연습을 하고 대회가 열리는 날 아침 일찍 모여 서울로 올라갔다. 올림픽 체육관에서 대회가 열렸다. 각 연회에서 내로라 하는 팀들이 제법 모였고. 뜨거운 열기 속에 대회는 진행되었다.
이틀 동안 진행된 경기에서 우리(원주서지방)는 결국 우승을 했다. 조별 풀리그를 걸친 예선전 포함 전승을 기록한 우승이었다. 중간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승이 준 즐거움은 모두에게 컸다. 저녁을 먹을 때도 그랬고 내려오면서도 내내 얘기꽃이 되었다.
<원주불패> 원주지방은 지지 않는다는 작은 신화가 다시 한번 이 어진 셈이다. (언제부턴가 원주지방은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했다. ‘ 원주불패’란 말속에는 그런 자부심이 담겨있다)
그동안 이런저런 대회에 나가고 우승도 여러번 했지만 그중 인상적인 대회를 대라면 이태 전 첫번째로 열린 동문체육대회를 대고 싶다. 역시 전국대회였고 연회 대표팀이 참석하는 대회였던지라 만만치 않은 대회였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면 체육대회가 있어 마을 대표로 나갔는데 결승전을 벌이다 손가락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블로킹을 하고 나니 손가락에 통증이 심했다. 보니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위로 젖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위로 꺾여질 수가 있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순간 믿어지질 않았다. 그 당황스러움이라니, 나는 아무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위로 꺾여져 올라간 손가락을 아래로 꺾어 폈고 경기를 계속했다. 티를 내는 것은 판을 깨는 것이라 여겨졌다. 경기가 끝났을 때 손가락은 말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변한 손가락이 퉁퉁 부어 있었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더니 인대가 파열됐단다. 운동을 하면 안 되느냐 물었더니 “절대” 안 된단다. 며칠 뒤 큰 대회에 나가야 한다고 했더니 ‘주전선수’만 하라신다. ‘주전자만 들고 다니는 선수’ 박규래 선생님의 농에 웃었지만 속은 참담했다.
이야기를 들은 최목사는 대뜸 “다 틀렸군” 했다. 그러는 걸 그래도 나간다했다.
대회가 열리던 날 아침. 가게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사곤 아이스크림 막대를 세 토막 내어 다친 손가락에 대고 반창고로 감았다. 손이 그래갖고 무슨 시합이냐고 아내는 내내 질색 달색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어디 좀 잘못돼도 그건 지불할만 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 상태로 출전한다는 말을 들은 최목사는 무릎에 진통제 주사를 맞고 올라왔고 이런 각오로 목회를 했다면 벌써 끝장이 나도 났을 거라는 농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시합을 했다.
쉬운 경기는 없었지만 우린(동부연회) 끝내 우승을 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센터로 뛴 최목사, 손가락 인대가 찢어진 채 공격수로 나선 나, 친구로써 함께 출전한 대회에 악조건이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우승을 했다.
시상식을 할 때 우리는 슬며시 코트를 빠져나와 차 한잔씩을 나눴다. 그때의 기분을 누가 알까.
삶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 그런 삶이 결국 아름다운 삶 아니겠는가. 주어지는 결과란 그런 것에 비하면 결코 어깨를 맞댈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닐 터이고.
(얘기마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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