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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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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581. J목사에게
‘인우재’에 올라와 두 아궁이에 불을 지핀 후 두레반이라 불리는 상에 앉았다.
산중의 겨울 해는 더욱 짧아 이내 땅거미가 깔리고, 전기도 없는 불편한 집, 촛불을 두개 밝히곤 그 앞에 앉았다. 이따금씩 밖으론 앵앵 찬바람이 지나고 그때마다 부엌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방바닥과 샘물을 받아 끓인 차의 온기가 밖에서 품고 들어온 한기를 덜어준다.
네게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됨은 어제 춘천을 다녀오며 내내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 때문이다. 어제 교우 일로 춘천을 다녀왔는데 춘천에서 선배 목사님과 친구 목사를 같이 만나게 되었다.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염려해 주어 큰 힘이 되었고 고마웠지. 선배 목사님께서 점심까지 사주셨는데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마침 이야기가 목회자 부자지간에 일어나는 얘기로 흘렀다.
요즘들어 어렵지 않게 들리곤 하는 얘기가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자기 아들을 후임 목사로 앉힌다는 얘기였지. 이젠 그런 얘기가 아주 희귀한 얘기만은 아니어서 당장 손을 꼽아도 너댓개는 금방 꼽을 정도로 주변에서 흔하게 대하는 일이 되고 말았지.
아버지의 후임자로 아들이? 사실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긴데 어디였을까, 진원지를 생각해보니 북한 얘기더구나. 더럽고 추악한 것의 대명사처럼 닳고 닳도록 들었던 세습. 그런데 이제는 교회에서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니.
나라가 어렵다 보니 재벌을 중심으로 한 경제계에서도 자기 재산을 사회(회사)에 환원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경영권을 자식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 넘기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보고 배워 뒷북치듯 교회에서는 뒤늦게 그런 일을 뒤따라 하고 있구나.
누군가는 그런 일이 장점도 없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더구나, 교회 분위기를 잘 알고 있고 교회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어서 좋다고, 그런 것이 긍정적인 이유가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현상에 대해선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결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아버지 목사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데는 ‘이 교회는 내 교회다’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교회인데 이 교회를 아무에게나 물려줘, 하는 미음이 전재되어 있다고 본다.
내 교회라니? 천벌을 받을 교만한 생각! 주님의 교회이지, 그토록 설교할 때 강조하곤했던 대로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지 어디 그게 내 교회일 수 있는가.
또한 그런 일을 생각하는 데는 교인들을 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면도 있지. 내 말이면 통해, 목사 말 거역하면 하나님 벌 받는 걸로 적당 세뇌시켜 놓고선 내 사람들이니 내말 따를 거라고, 혹 반대하는 이 생기면 니들이 나가라고. 나가서 잘 되나 보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지. 그 또한 얼마나 큰 교만이겠니. 어디 교인이 내 사람이겠니? 하나님 거룩한 백성이지. 사업하는 사람들도 그러지 않으려 하는 판에 교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막하는 구나.
내가 목사라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디 굴속에라도 숨고 싶은 참담한 마음이 들곤 한단다.
J목사야.
어쩌다 보니 너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리에 있게 됐고, 그날 얘기에서도 잠깐 네 얘기가 나왔다. 나는 설마 네가 그런 일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만 주변에선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게 사실이구나.
아버지가 피와 땀으로 일궈 세우신 교회를 미련 없이 등진다는 것이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크게 어려운 일일까.
설령 아버지는 자식 사랑하는 맹목적인 마음에 그런 생각 할 수 있을진 몰라도 젊은이는 그러면 안되지. 젊은 목회자마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다면 어찌 교회에 희망이 남아있겠니. 엘리 제사장 집안의 몰락이 이런 일과 크게 무관하다고 보여지지는 않는구나. 예수가 광야에서 받았던 시험의 내용도 결국은 ‘쉬운출발’에 대한 유혹 아니었겠니.
주변에 아무리 귀에 단 얘기를 하는 충성된 교인들이 있어도 아니다 할 건 정직하고 분명하게 ‘아니다’ 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알기에 더욱 단호한 마음으로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했던 예수, 우리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면 그 예수의 단호함과 분명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J목사야.
아직 네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특수한 자리에 있는 네 처지를 볼모삼아 내 도덕성을 자랑하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다만 그럼에도 이 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은 행여라도 네 마음이 갈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가 ‘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길’에 대한 이야기이며, 몇몇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너를 좋은 후배. 좋은 길동무(도반)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능력 때문은 아니다.
너의 첫 목회지에서 네가 보여준 가난한 자들을 향한 헌신, 내가 기억하는 너의 진면목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금단의 열매’ 소위 ‘큰 목회’에 대한 미련이 유혹처럼 찾아들 때 네가 너 다움을 잃지 않기를 빈다. 사실 큰 목회가 도대체 뭐겠니. 인간의 탐욕을 가리는 변명으로서가 아니라 그분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 그것 아니겠니.
망설이다 이것저것 잃지 말고, 뜻이 분명하여 멋진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너를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은 내 경박함을 용서하렴. 모든 기득권을 기꺼이 버리렴. 몇 번 서로 자리를 돌리는 당구알식 발상 까지도 모두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 땅의 교회가 소망을 잃은 것이 아니란 것을 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르치렴.
그래, 이런 얘기를 끝내 하는 것은 우리가 같은 길을 가는 ‘길벗(도반)’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얘기가 목회의 현실을 모르는 시골교회 촌뜨기 목사의 순진한 일수도 있겠다만 아직은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한 소중한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엎드려 너그러움을 빈다.
1998.1.19. 인우재(바보집)에서
(얘기마을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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