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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이해인 이해인............... 조회 수 1149 추천 수 0 2010.12.11 10:16:03
.........

1020-1033. 

 

가을편지

 

1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2.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몇 마리 참새가 울리는 명랑한 아침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3.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로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4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 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詩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겹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5.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6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7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 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 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욱 작아보이는 나의 얼굴. 

 

8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 색 나팔 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9
귀뚜라미 노래소리에 깊어 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10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때까지.
 
11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 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2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깎아 이 글을 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여져 조금씩 닳아 가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13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촛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14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대는 시심(詩心)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움일 것을'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음을 아려 주십시오.
 
15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가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아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처럼 오십시오.
 
16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이 가을엔 꼭 찾아 얻게 하소서.
꽃이 죽어서 키워낸 열매,
당신이 죽어서 살려낸 나,
가을엔 이것만 생각해도 넉넉합니다.
 
17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우산도 채 받지 않고 길을 가는 이들의 적막한 얼굴 속에서 나는 당신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삶은 비애를 긋고 가는 한 줄기 가을비일까] 혼자서 나직히 뇌어보며
오늘은 더욱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18
언제나 한(恨)과 눈물이 서린 듯한, 그러나 나를 낳아 준 모국의 정든 산천.
하루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쓸쓸한 이마를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살아서도 이미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나의 이웃들을
지금은 그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힘이 없어보입니까.
 
19
오늘은 빨갛게 익은 동백 열매 하나 따 들고 언덕을 오르며,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 또한 이 작은 열매처럼 하도 잘 익어서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20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내 하얀 머리수건 위에 올려 놓은 바람.
그리고 손에 쥐어보는 유리빛 가을 햇살.
잠자리 날개의 무늬처럼 고운 설레임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당신의 가을 햇살
잊지 못합니다.
 
21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22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꽂아 둔 장미꽃 몇 송이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예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23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을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감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24
늦가을, 산 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 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 보듯이
 
25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26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27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 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28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마리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묵의 향기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29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바람이고 싶습니다.

 

30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31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32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33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34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 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이해인(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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