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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일기5 -삶의 층계에서 별을 안고

이해인 이해인............... 조회 수 2178 추천 수 0 2012.01.08 01: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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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1120

기도 일기5 -삶의 층계에서 별을 안고

 

1.
새해를 위하여 새 달력을 거는 나의 기도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어 내는 힘'을 주십사고 빌고 싶은 것, 그래서 더욱 기쁨이 되는 삶의 희망을 달력과 함께 새로 달고 싶은 것.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 인사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인사를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라는 구상 시인의 '새해'라는 시도 다시 새롭다.

 

2
새벽이다. 잠에 취해 쓰러졌던 나의 꿈과 희망도 나와 함께 일어나 새벽의 찬 바람이 다듬이질해 준 새 옷을 껴입는다. 찬물을 틀어 세수하다 문득 마주친 내 팔목 위의 시계. 오늘 하루 살아 갈 힘을 태엽 위에 감으며내 탓으로 죽어 있던 지난 시간들도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살려내고 싶다. 멈춰버린 시계에 밥을 주듯이 우울하게 고장난 내 마음에도 기쁨의 밥을 주며 다시 깨어나는 행복한 아침이여.

 

3.
성당 창 밖의 참새 세 마리가 나를 초대하는 아침. 앉아서도 온 세상을 걸어다니는, 숨어서도 온 우주를 날아다니는 기도 속의 자유를 감사하고 싶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랑의 수인(囚人), 죽을 때까지 고뇌하며 '나'라는 감옥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자유에의 갈망을 또한 감사하고 싶다.

 

4
우리 집에선 늘 남산이 보인다. 도시 한복판에 내려앉은 너그러운 산.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만만한 산, 남산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5

한 장의 신문이 왜 이리 무거운가. 전쟁, 살인, 폭력 등 끔찍한 기사들로 채워진 신문의 무게에 눌려 밝은 아침도 어둡고 무거워진다. 신문에도 보도 안된 어지러운 세상 소식들을 계단에 올려 놓고 착잡한 기도를 시작한다.

 

6.
타오르지 못하면 제 몫을 못하는 한 자루의 초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제 몫을 못하고 꺼져 버릴 우리들의 삶 - 너와 나의 흰 초에 촛불이 켜질 때 아름다운 불길의 찬미가 오늘만의 것은 아니도록 다시 사랑하자, 하느님과 이웃을. 다시 태우자, 나를. 다시 희망하자, 내일을.


7.
본회퍼의 옥중서한 몇 줄이 나를 붙든다. "종소리 속에서는 일체의 불안, 감사할 줄 모르는 것, 이기심이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착한 온정에 둘러 싸이는 것과도 같이 돌연 아름다운 회상에 잠깁니다."라고 그는 쓰고 있었지.
 
8
하인리히 뵐의 단편집과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을 틈틈이 읽으며 그 작품들을 통해 내가 만나는 착한 이웃들 -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더욱 새로왔고 <치이즈가 든 수우프> <바닷가의 추수> 등도 그 특유한 따뜻함이 가득하다. 도데의 <별>,황 순원의 <소나기>, 강 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같은 단편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읽고 나면 인간의 가슴에 잔잔한 여운과 빛을 남기는 글들을 나도 쓰고 싶어진다.

 

9
나의 빈 방에 누군가 갖다 놓은 한 잔의 따뜻한 차(茶). 이름 없이 살짝 갖다 놓은 선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더 수중하게 느껴진다. 보이지 않게 베푸는 사랑의 손길에 늘 고마와하는 사람이 되자.

 

10
날이 추우면 걱정되는 나의 이웃들이 있다. D학원 앞길에 앉아 9년이나 구두를 깁는다는 신기료장수 할아버지, 돈이 없어 돋보기도 사지 못한, 다섯 식구의 가장인 그분의 주름진 얼굴의 잔잔한 미소와 평화를 만나고 싶어서, 나는 일부러 그 앞을 지날 때가 있다. 정성껏 구두를 깁던 할아버지의 손에 조용히 내려앉던 햇살처럼, 나도 그분에게 조그마한 기쁨이나마 선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본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오징어 파는 아줌마의 활기찬 모습이 떠오르면 나도 더욱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장사하는 중에도 틈틈이 성서공부를 하고 있던 그분의 모습에서 내가 배우는 삶의 용기와 지혜. 그분과 많은 말은 안 했지만 그분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워지는 날, 나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이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나의 이웃들 덕분에 나는 오늘을 편하게 사는 게 아닐까. 멀리 또 가까이에서 나도 모르게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나는 늘 기도해야겠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직접 나누어 갖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기 전에 우선 내가 당하는 작은 어려움들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인내를 배워야겠다.

 

11
밤이 오는 층계에서 별을 바라봅니다. 내가 사는 집에는 층계가 많아 나의 하루는 수시로 숨이 차지만 다람쥐처럼 하루를 오르내리는 삶의 즐거움이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층계, 갈수록 높아 뵈는 삶의 층계에서 별을 안고 기도하는 은은한 기쁨이여. 별이신 당신을 오늘도 바라봅니다.

 

ⓒ이해인(수녀)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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