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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1927 <하루기도/생활성서>13
채워지는 빈자리
저녁 산책길에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떨어진 알밤을 주웠습니다.
아예 밤송이 밖으로 나와 풀숲에 숨은 놈도 있고,
아직 밤송이 안에 들어 있어서 발로 밟고 헤집어야
모습을 드러내는 놈도 있더군요.
밤알을 까다가 가시에 찔렸는데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아팠어요.
저렇게 삼엄한 경계로 지키던 것들을 밖으로 내놓는 건
또 무슨 심사일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어찌 밤나무가 제 의지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아아, 주님.
저도 제 의지만 비우면,
그러면 저 밤나무처럼 천연天然해지는 걸까요?
주먹으로 주먹을 꺾을 수 없듯이,
제 의지로는 제 의지를 비울 수 없으니,
주님이 제 속을 점령하시어 제 의지를 몰아내시고
그 빈자리를 당신의 의지로 채워주십시오.
그 수밖에는 제가 천연해질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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