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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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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14 <物과 나눈 이야기들/민들레교회이야기452>에서
14. 해바라기 열매
디아코니아 언님들이 가꾼 해바라기 열매 한송이. 햇볕에 참 잘도 익었다. 손으로 건드리면 참았던 웃음 터트리듯 낟알이 톡톡 튀어나온다.
낟알 하나에서 이렇게나 많은 낟알이 생겨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이와같은 자기 복제의 과정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을까?
겉으로는 단단하게 굳어져, 노자(老子)가 말한 사지도(死之徒)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시치미 뚝 떼고 흐르는 생명의 도도한 물결을 본다.
그렇구나! 세상에 죽은 것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주검은 있어도 죽음은 없구나.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약간 어지러워진다. 낟알 하나하나가 부드러운 곡선(曲線)을 만들며 흐르고 있다.
"어지러운가?"
"그렇다. 너의 흐름을 따라서 내 몸도 흐르는 것 같다."
"그래서 어지럽다고? 아닐세. 자네가 어지럼증을 느끼는 까닭은 나와 함게 흐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나와 함께 흐르지 않기 때문이라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와 함께 흐르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조금도 어지럽지 않다네."
"너와 내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
"조금도 다를 바 없네. 찾아 보시게. 자네와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다른지."
"나는 사람이고 너는 해바라기 아니냐?"
"그건 우리의 이름이고, 자네 이름이 곧 자네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인데?"
"나는 동물이고 너는 식물이 아니냐?"
"동물도 식물도 물(物)이긴 마찬가지지."
"........."
"흐름을 타고 흐르는 물(物)은 어지럽지 않다네. 어떤가? 자네는 지구의 자전.공전 때문에 어지럼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
"할 수 있거든 내 속에 들어와 나와 함께 곡선으로 흘러 보게나. 아무데서도 시작되지 않았고 아무데서도 막히지 않은 나의 이 아름답고 끝없는 곡선에 자네 몸을 한번 맡겨 보시게. 거기가 바로 적멸보궁(寂滅寶宮), 태고(太古)의 고요가 숨쉬는 곳이라네"
해바라기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 너그러운 웃음 속에서 문득 비로자나의 자취를느껴본다.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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