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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아닌 봄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790 추천 수 0 2002.05.09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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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봄이 아닌 봄

며칠 전 평소 교분이 있는 대학 교수와 농사를 짓고 있는 젊은 농사꾼을 모시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교회에서 마련하였다.
아무 대책도 없이 기울어져 가는 농촌. 뭔가 대책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다시 한 번 농사철이 돌아왔지만 무얼 어떻게 심어야 좋을지 몰라하는 것이 마을의 형편인지라 적절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한 사람은 친환경농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농학과 교수이고, 또 한사람은 직접 친환경적인 농사를 짓고 있는 농사꾼. 이론과 실제를 겸하여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 여겨졌다.
예배당에 난로를 피워놓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되도록 참석한 사람들은 몇 사람이 되지 않았지만 곧들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먼저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양의 곡식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정부의 방침이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고, WTO체제 하에서 우리 농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지은 농산물에 대해서 품질인증을 받아야만 농산물을 팔 수 있는 시대가 벌써 다가왔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이나 미국등 땅덩어리가 큰 나라의 농산물이 자유롭게 들어오기 시작하면 국내 농산물이 가격경쟁에서 뒤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친환경 농산물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에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농사짓는 땅의 상태가 어떤지 토양을 검사 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건강 상태를 알고 싶거나 어딘가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농사짓는 땅의 상태가 어떤지를 아는 것은 농사를 짓는데 가장 기본적인 일일텐데 지금까지 내 농토에 대해 토양 상태를 검사 받았다는 사람은 참석자 중 한사람도 없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의 남용으로 현재 전 농토의 90%이상이 친환경 농업이 불가능한 땅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에 마음이 아팠다.
다음으로 나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농사꾼. 그는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봐서 그랬을까. 그의 말투와 말의 내용과 얼굴 표정에서는 흙 냄새가 물씬 났다.
우직하고 묵묵한, 투박하며 따뜻한 삶, 여느 사람에게서 흔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농약을 많이 치는 대파를 무농약으로 기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생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실제로 농사짓는 입장에서 교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는데,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 난 마음이 아팠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 농촌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사람들은 10여명의 사람들뿐이었다. 10여명 또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의 한 분은 약주 기운에 자꾸만 주제에서 벗어난 말로 이야기를 가로막고는 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길을 찾아보기를 원했던 마을 젊은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앞날에 대해 자신이 있는 것일까?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나이만으로도 쉽지 않은 노인들 그나마 친환경 농업의 의미보다는 대파를 심어 얼마를 벌었는지, 평당 수입이 얼마나 됐는지, 밭뙈기였는지 아닌지, 그런 계산에 더 큰 관심이 쏠려 있었다. 지난해까지 계약 재배를 했던 감자가 올해는 아무런 제안이 없어 무얼 심을까 막막하던 차에 계약재배 이야기를 기대하고 참석했던 것인지, 생각지 않았던 환경농업 이야기에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서운했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건 어쩜 체념의 두께인지도 몰랐다. 이 땅에 사는 젊은 농사꾼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절망의 무게인지도 몰랐다. 이제껏 참석해 본 영농교육이 어디 한 두 번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달라 진 것 없는 삶, 체념을 그때그때 묻었을 뿐 어디에도 길은 없다고 이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걸 몰라서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이다, 하는 뻔한 투의 훈계를 짐작하고선 아예 자리를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농촌에서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이 늦도록 쉽지 않은 마음이었다. '아예 외면하든지, 흠뻑 뛰어들든지!' 어정쩡한 삶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것인지를 괴로움으로 자책하며 안정해야 했다.
그것이 절망으로 기울어진 이웃의 마음이건, 미생물도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 되어버린 땅이건 이 땅에서 나는 가장 성실하고 가장 미련한 농사꾼이 되어야 할 터, 그 일에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했고 비참했다.
봄이 왔다지만 봄이 아닌 이 땅! 봄이란 겨울을 이긴 자만이 맞이하는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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