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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흙 묻은 손길들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84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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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796.흙 묻은 손길들


주일낮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방금 예배 마치고 올라간 김천복 할머니였다. 뜻밖의 전화였다. 박수철 씨네 집에서 예배를 드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작실길이 포장되고 개통식이 있던 날, 그날 아침 박수철 씨는 졸지에 쓰러졌다. 차를 대절해 병원에 나갈 때만 해도 잠깐 치료받으면 괜찮겠지 했는데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회복 못한 채 벌써 2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다급해진 아주머니가 예배를 청하였던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함이었다.
방안 가득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의 마음속엔 간절함이 넘쳤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의식불명의 상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박수철 씨를 며칠 전 찾아가 기도하기 위해 손을 마주 잡았을 때 무의식중에도 박수철 씨는 내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런 손을 잡고 기도하며 주님이 이 손을 대신 잡아 달라고 기도했었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두 손을 꼭 잡았던 절박한 손길.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의 눈은 누구랄 것도 없이 눈물로 젖었다. 그렇게 첫 예배를 드린 것이 벌써 지난 연말의 일이다.
봄철 심방 중 작실속 심방을 마칠 때 박수철 씨 아주머니가 심방을 다시 청했다. 늘상 병원에서 병간호를 하다 잠깐 틈을 내 집으로 들어온 것인데 마침 심방 중인 것을 알고선 예배를 청하였던 것이다.
급작스런 변을 당한 후 박수철 씨는 조금씩이나마 병세가 호전되어 지금은 재활의학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치료를 요하고 있다. 이따금씩 병원에 들릴 때마다 애써 힘겨움 감추며 기도를 청하고, 없는 살림에 정성껏 감사헌금도 드리는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머리엔 흰머리가 확 퍼지기 시작했다.
예배시간 내내 아주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겐 많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이 맡아 주소서.”
기도하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렇다, 우리는 한없이 무력했다. 아주머니는 어느샌지 점심을 준비했고, 심방 돌며 먹은 음식이 적지 않았지만 우리는 기꺼이 다시 한번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며 우리는 아주머니의 딱한 심정을 얼핏 듣게 되었다. 잠시 짬을 내 들린 김에 강가 밭 당근씨를 뿌렸으면 싶은 것인데 아주머니로선 엄두가 안 났던 것이었다.
얘기를 들은 교우들이 함께 나섰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찬바람이 제법 불어대는 음산한 날씨. 바삐 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교우들의 뒷 모습이 아름답고 거룩했다.
허름한 옷차림, 그러나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려는 더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들!

고집스레 무릎 꿇고 드린 이틀간의 심방예배, 은근히 다리가 아팠지만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곤 함께 강가 밭으로 나갔다. 물 마른 염태 개울 옆의 강가 밭, 벌써 일들이 시작되었다. 얘길 들은 마을 할머니와 아주머니 몇 분도 함께 나와 있었다.
트랙터가 갈아놓은 밭이 보기에도 좋았다. 나란히 쳐놓은 골을 따라 앞사람이 씨를 뿌리면 뒷사람은 손으로 씨를 덮었다. 눈 대중으로 일을 배운 후 함께 일을 거든다. 너무도 부드러워  천상 젖가슴인 기름진 검은 흙, 그 흙으로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씨를 덥는다. 축복하는 손이 따로 없었다. 씨를 덮는 손마다가 그런 손이었다.
얼만큼 하자 이내 쑤셔오는 허리, 휘끈 허리를 펴 고개를 들자 핑 도는 두 눈,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뒷산이 해를 가릴 때에야 일이 끝났고 우리는 서둘러 넓따란 강가 밭을 지나 매래 밭으로 옮겨갔다. 마저 일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서서히 땅거미가 깔려들고 있었고 계속 굽히고 하는 일, 어느새 축 늘어지고 말았다.
대개가 7- 80된 노인들, 우영기 속장님만 해도  병약한 몸 아닌가. 저런 몸으로 이런 일을 매일같이 하다니, 그건 무쇠덩어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고생을 하여 씨알 굵게 길러낸 허석분 할머니네 작년 당근 값이 400평에 20만원이었으니.
나야 집에 가면 아내가 따뜻한 저녁상을 차려 주겠지만 이분들 대부분이 어둠 속 돌아가 스스로 저녁상을 차려야 할 분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연민이 꾸역꾸역 솟아 올랐다. 이 질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나, 막막함이 가슴을 눌러왔다.
일을 마치고 선 강가 밭에 나온 상근네 아버지 트럭을 무슨 커다란 은총인 냥 얻어 타고 뒷칸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잔뜩 내려앉은 하늘이 어둠 속 찬비로 흩뿌리기 시작했고, 잘가라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흙묻은 손길들, 지친 손길들.
밤이 제법 깊었다.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지만 잠에서 벗어나 책상에 앉았다. 이 땅, 이 땅에서 어찌 살 것인가. 이땅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살 수 있는가. 되지도 않는 물음, 답할 것도 없는 물음들이 멍한 머릿속 거미줄을 치고, 째깍째깍 시계소리만 마냥 가슴을 밟고 지나고.
(얘기마을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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