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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 떠날 수 없는 곳을 향한 떠남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432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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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307.떠날 수 없는 곳을 향한 떠남

 

 한 신학대학에 다녀왔다. 영성훈련 시간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맡을 시간이 아니다 싶어 사양했는데 결국은 가게 됐다. 

교목실을 찾아갔을 때 한 분 목사님은 전화를 받고 있었고, 한 분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일었다. 잠시 서 있자 전화 통화를 마친분이 다가와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고, 순서를 맡아서 왔다고 대답하자 몹시 미안해했다. 학생들 의견을 따라 강사를 정했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인 줄 몰랐다며 대학원 학생이 일이 있어 들린 줄 알았다고 했다.

영성훈련은 이틀 동안 열렸다. 신학과 전체 학생들과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참석한 모임이었는데 찬송과 기도가 인상적일 만큼 뜨거웠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네 시간 그렇게 길게 얘기할 이야깃거리도 자신도 없었고 또 앉아 듣는 이들의 고충은 얼마나 클까 싶어 얘기를 할 만큼 하고 서로 물고 대답하는 시간으로 갖기로 했다. 

‘떠날 수 없는 곳을 향한 떠남’이라고 주제를 정했다. 더는 떠날 수 없는 부름받은 이가 마침내 가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첫날, 강의를 마치고 묻고 대답하는 시간을 갖는데 한 학생이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 시골에서 뭘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을 하기로 했다. 망설여지긴 했으나 얘길 듣는 이들은 머잖아 목회를 나가야 할 이들이고 그들 대부분은 나처럼 시골 목회를 할 사람, 솔직한 대답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먼저 교회서 받는 내 생활비부터 밝혔다. 학생들의 시선이 관심있게 모아졌다. 시골서 목회한지 9년이 되었다는데 그 정도면 얼 마를 받나, 아이가 셋이라는데 그렇게 다섯 식구가 살려면 얼마가 필요한 걸까, 학생들은 자신이 곧 맞이하게 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순간적으로 조용했다.

“35만원 받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순간적으로 학생들은 당황해했다. 또 순간적이었지만 당황해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나대로 당황을 했 다. 

9년전 단강으로 들어올 땐 생활비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예배당도 사택도 없는데 생활비를 따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떻게든 살겠지.’ 하는 불확실한 기대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고 든든하게 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35만원을 받으니 꽤나 안정이 된 셈이다.(사실 나는 잘못 알고 있었다. 다녀와 아내와 이야길 하다 보니 35만원이 아니라 30만원이었다.) 

아무데고 필요한 자리가 있으면 가고, 거기서 형편껏 사는 게 당연 하다 싶었는데, 생활비  이야기를 들으며 당혹스러워하는 학생들의 표정속엔 그런 당연함이 더이상 당연함일 수 없다는 심정이 담긴 것 같아 나는 나대로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길 하자. 적은 생활비를 받는 것 자체가 순교자의 삶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얘기를 잇게 한다.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30만원의 생활비로는 살 수가 없다. 약간의 도서비와 목회비가 있고 용두동 교회의 배려가 있다. 월 2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도움을 받는다.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일지 모르는데, 목회보고서 같은 요구도 없이 묵묵히 큰 사랑을 전할 뿐이다.

그밖에 때때로 강사료와 원고료가 보탬이 된다. 하나님 말씀 전했는데 강사비가 뭔 감사비냐며 일체의 강사비를 받지 않는다는 일부 목회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홀가분하고.

그때 그 자리에서 용납됐던 솔직함을 이 자리에 옮기는 게 무리인 줄은 안다. 하지만 못난 내 얘기를 통해 우리 얘기를 하고 싶다. 

이런저런 계산과 판단으로 외진 곳을 망설이는 이들이 있는가? 더 나은 조건을 찾다 쉬 뿌리를 거두어 떠나는 이들이 있는가? 

목회자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부(富)에 대해 너무 욕심이 크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는가? (그럭저럭 나는 궁색하지도, 그렇다고 청빈하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 땅 구석구석 그늘진 곳 열악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버팀목 삼아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 얘기를 하고 싶었다.

 피가 온몸을 골고루 돌 때 우리가 온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이 땅이 그나마 살아 있는 것은 외진 곳에서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걷는  그들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들을 무능력하다고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무엇에도 상관없이 한 주인을 제대로 섬기는 일을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나까.

(얘기마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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