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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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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774.뿌리
원주에서 단강에 들어오던 버스가 귀래에 섰습니다. 몇몇 손님이 내리고 버스를 기다리던 많은 손님들이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손님 중에는 스님도 한 분 있었는데 그는 맨 꽁찌, 느긋하게 버스에 올랐습니다. 스님이 버스에 올라 중간쯤에 섰을 때 그 스님을 알아본 한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도 합장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안면이 있는 두 분 같았습니다.
아저씨의 거듭되는 자리양보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서서 가겠노라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리를 권하던 아저씨도 엉거주춤 서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저씨가 스님께 물었던 말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물음 뒤에 아저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고리에 달았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조상이 우상’이라 하던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찔했습니다. 아저씨가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조상이 곧 우상이라고,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 말하고 있는 것인지요.
그런 아저씨의 질문에 대해 스님은 창 밖 나무를 가리키며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 그런 얘기를 듣는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조상이 곧 우상’이라는 이해는 그 아저씨가 스님을 만났기에 한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고, 더더군다나 그런 이해가 그 아저씨만의 이해는 아닐 듯 싶었습니다.
‘토착화’라는 말은 신학교의 강의실에서 뿐, 왜 우린 이리도 소극적일까. 왜 이리도 어정뜬 것일까. 알아서 하라는 듯 왜 시원한 입장 표명이 없이 많은 이들을 괴롭게 하고 주저하게 만드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할아버지 기일. 집에 가지고 못하고 아들이 목사라고 전화를 걸어 추도예배 드리며 읽을 성경과 찬송을 물으신 아버지께 그것 대답한 걸로 모든 걸 때워 넘기는 나 자신이 그렇게도 가볍고 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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