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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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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403.좋은 기다림
교회 뒤뜰엔 나무 몇 그루가 있습니다. 향나무, 감나무, 자두나무, 느티나무, 무궁화나무 그 중 한 개가 산수유입니다. 산수유는 잎보다도 꽃이 먼저 피어나 단강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나무입니다.
예전엔 산수유 세 그루만 있어도 자식 대학 보낼 수 있다 하여 대학나무로도 불렸다지만 지금은 관상수로 널리 보급되어 어디서나 어렵잖게 볼 수 있습니다.
초봄, 노랗게 피어났던 꽃들이 여름 지나 가을이 되면 빨간 열매로 맺힙니다. 빨갛게 맺힌 열매들은 다시 한 번 꽃을 피워낸 듯 아름답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교회 뒤뜰의 산수유는 동네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시고 텁텁한 맛인데도 아이들은 간식삼아 산수유를 잘 먹습니다. 입에 넣었다 싶게 툭, 이내 씨를 뱉어내는 솜씨들이 일품입니다. 입술과 혀를 붉게 물들이며 맛있게 먹기도 하지만 때론 장난삼아 따기도 합니다.
올라가기 좋은 야트막한 높이와 발 딛기 좋도록 알맞게 퍼진 가지, 가지 끝마다 달려 있는 붉은 열매들, 아이들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러다 떨어질라” 할 뿐 더 이상 아이들을 말리진 않습니다. 가을 한철 아이들에게 즐거움 되는 일도 좋은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을 올해는 산수유를 땄습니다. 아이들 차지 되기 전 툭툭 털기도 하고 아이들처럼 가지에 올라가 손으로 따기도 했습니다. 모두 따니 제법 많은 양이었습니다.
산수유가 한약재로 쓰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찻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들은 건 얼마 전이었습니다. 시험 삼아 몇 개를 따다가 끓여 보았더니 빛깔이 은은하고 맛도 그윽한 게 참 좋았습니다. 따서 말렸다가 한 겨울 단강 찾는 이들에게 차로 대접하면 흔한 차보다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 이유로 산수유를 땄습니다. 언덕빼기 구기자도 따는 김에 같이 땄습니다. 모양과 빛깔이 산수유를 빼닮은 구기자가 늘어진 가지 끝에 올망졸망 제법 달려 있었습니다.
자리를 옥상에 펴고 며칠을 말렸습니다. 좋은 찻감을 마련하는 것의 즐거움을 전에 모르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비가 왔고 비를 피해 옥상의 자리를 광으로 옮겼습니다. 며칠 바쁜 일로 잊고 있다 퍼진 햇살에 생각 나 광으로 갔더니 아차 싶게 산수유와 구기자가 진물러진 채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한겨울에 대한 좋은 기대가 며칠의 부주의로 쉽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좋은 기다림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광 속에 버려진 산수유와 구기자를 통해 난 새삼 배웠습니다.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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