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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우리의 목자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75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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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837.우리의 목자


제법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겨울, 그러니까 동부연회가 열리던 때였다. 숙소에 모인 우리들은 오랜만의 만남이 주는 즐거움에 밀린 얘기를 나누고 있었 다. 그때 김형과 한형(혹 누가 될까 싶어 이름을 쓰지 않는다)은 방 한쪽에 마주 앉아 뭔가 보따리를 끌러 놓더니 둘만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끌러 놓은 보따리엔 이런저런 한약재들이 널려 있었다. 무슨 얘길 나누는지 두 형은 한약재를 냄새를 맡아 분류하기도 하고, 또 뭔가를 쓰기도 하고, 아무튼 보통 나누는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사정이 궁금해 다가가 물었더니 기막힌 얘기였다.
김형은 동해안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대로 김형은 꼭 '소'같아서 묵묵히 묵묵히 살아간다. 김형의 얘기인즉 교우들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이 많아 한약을 권하고 싶은데, 사정들이 딱해 맘대로 한약방에 가 약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생각해낸 것이 바로 한형의 도움을 받는 일이었다.
산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한형은 동양사상에 대한 해박함은 물론 한방에도 제법 넓은 식견이 있어 웬만한 증세에 진맥 후 스스로 처방을 내리기도 하고 약재상에서 약재를 구해 약을 조제해 주기도 한다.
김형의 생각인즉, 같은 증세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중 한 사람이 한약방에 가 약을 지은 후 그 지은 약의 성분대로 다른 사람 약을 지으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픈 사람이 먼 길을 오지 않아도 되고, 약재값만 들이면 되니 훨씬 싼값에 약을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한형은 펼쳐 놓은 한약재의 성분을 모양에 따라, 냄새에 따라 혹은 맛에 따라 분류를 하였고, 김형이 들려주는 교우들의 증세와 약효를 맞춰가며 뭘 얼마큼에 뭘 얼마큼, 그런식으로 약 처방을 일일이 기록해 나갔다.
말하자면 그건 편법이다. 어찌보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형편상 약 한첩 지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런 편법(?)을 찾아내고 머리를 맞대 처방을 찾는 두 형의 모습은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그 진지함은 아름다움을 넘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저런 약을 먹는다면 무슨 병에 걸렸든 그 정성 하나로도 쉽게 일어설 것 같다는 무조건적인 신뢰감마저 들었다.
한약재를 펼쳐놓은 두 형의 모습이 좋은 목자의 모습으로 다가 왔다. 우리와는 낯선, 어린 양을 품에 안은 그런 모습으로가 아닌, 친근하고도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으로. (얘기마을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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