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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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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이랴’와 ‘워’
사람이 소를 부리는 데는 적어도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 ‘이랴’와 ‘워’가 그것이다. 이랴’는 앞으로 나가라는 말이고 ‘워’는 멈추라는 말이다. 소가 사람과 함께 일을 해내려면 최소한 이 두 마디 신호는 알아 들어야 한다.
요즘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도시고 농촌이고 할 것 없이 이런 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으니 ‘이랴’니 ‘워’니 하는 말 자체가 사전 속 고어로나 남게 될 운명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소를 부릴 적에 ‘이랴’뿐 아니라 ‘워’라는 말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보편적인 진리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말하자면 소를 부림에 일을 “하라”는 뜻인 ‘이랴’ 뿐 아니라 “그만두라”는 뜻인 ‘워’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은 사람이 하는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또, 적용되어야만 한다. ‘워’없이는 ‘이랴’가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
컴퓨터로 대표되는 최첨단 과학기계를 부리는 데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제어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모든 기계가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나아가 인간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달고 있다 해도 구르는 바퀴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장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경우에 그 자동차는 아까운 사람 목숨만 잡아먹고 말 것이다. 내달리는 것도 좋지만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 몸을 기계에 견주는 것이 좀 엉뚱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육신도‘워’없이 이랴 만 가지고는 부려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걸 무시하니까 덜컥 병들어 눕게 되는 것이다. 지난 주간에 드디어 예측한 대로(?) 자리에 누웠다. 한 번 눕기로 하니까 내 몸은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다른 데보다 특히 목구멍과 기관지가 있는 앞가슴의 반발이 심했다. 눕기 직전에 내 생각에도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대를 부리긴 했다. 끊임없는 기침이 쏟아지면서 기관지 부근이 저려 왔다. 거기에다 오한이 나고 손과 발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사시나무 떨 듯 떨어 댔다. 마침내 나의 몸은 나의 명령을 기다리다 못해 스스로 ‘워’를 선언해버렸다. 그러고는 뻗어 버린 것이다. 속수무책, 겨우 뒷수습에 나선 나는 몇 군데 약속해놓았던 ‘일’의 중단을 선언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구들장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한 이틀, 문자 그대로 완전휴식이 들어가 말하자면 정신없이 앓았다. 그러고 나니 겨우 열이 가라앉으며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화가 이철수가 아침 재를 넘어 와서 보신탕을 나누었고 육신의 반란도 이쯤해서 끝나려는가 싶어, 눈치 보듯 지금 이 글을 쓴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적에 이렛날을 “거룩하게” 만드시고 그 날은 옹글게 쉬라고 명령하신 뜻을 이제 조금 알겠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성(聖)이라는 형용어가 붙은 것이 이렛날 곧 ‘쉬는 날’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메시지를 인간에게 암시해주고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온갖 생명체들 가운데 스스로 쉴 줄 모르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동물 밖에 없으리라. 왜 인간은 쉬지를 않는가? 누가 쉬지 못하게 강제하는가? 인간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인간을 쉴 줄 모르는 동물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또는 쉴 수 없도록 남에게 일을 강요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날마다 쉬지 않고 잡아 먹는다.
그러기에 병들어 눕는 것이 어쩌면 하늘이 마련한 최후의 은총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다른 치유책이 없을 때 훌륭한 의사는 독약을 쓴다. 맹렬한 산불을 잡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 맞불을 놓아 불을 삼키게 하는 것이듯이, 생명의 원리는 어쩔 수 없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인간에게 ‘질병’을 안겨주는 것이다. 과연 “병이 곧 치료”라는 말은 옳은 말이다.
안식일은 안식일 교도들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살아 남기 위하여 우리는 그 날의 뜻을 절실히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친구인 북산(北山)이 고급 등산화를 사서 보내 왔다. 나에게 그것은 그냥 가죽으로 만든 구두가 아니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경건하게 살펴보라는 간절한 메시지였다. 소도 사람도 ‘이랴’만으로는 부릴 수가 없는 법.
여기까지 쓰고 났는데 갑자기 우리 집 강아지 ‘꿈’이 어두워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짖어 댄다.
워 워 워... ⓒ이현주 (목사)
사람이 소를 부리는 데는 적어도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 ‘이랴’와 ‘워’가 그것이다. 이랴’는 앞으로 나가라는 말이고 ‘워’는 멈추라는 말이다. 소가 사람과 함께 일을 해내려면 최소한 이 두 마디 신호는 알아 들어야 한다.
요즘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도시고 농촌이고 할 것 없이 이런 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으니 ‘이랴’니 ‘워’니 하는 말 자체가 사전 속 고어로나 남게 될 운명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소를 부릴 적에 ‘이랴’뿐 아니라 ‘워’라는 말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보편적인 진리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말하자면 소를 부림에 일을 “하라”는 뜻인 ‘이랴’ 뿐 아니라 “그만두라”는 뜻인 ‘워’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은 사람이 하는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또, 적용되어야만 한다. ‘워’없이는 ‘이랴’가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
컴퓨터로 대표되는 최첨단 과학기계를 부리는 데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제어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모든 기계가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나아가 인간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달고 있다 해도 구르는 바퀴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장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경우에 그 자동차는 아까운 사람 목숨만 잡아먹고 말 것이다. 내달리는 것도 좋지만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 몸을 기계에 견주는 것이 좀 엉뚱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육신도‘워’없이 이랴 만 가지고는 부려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걸 무시하니까 덜컥 병들어 눕게 되는 것이다. 지난 주간에 드디어 예측한 대로(?) 자리에 누웠다. 한 번 눕기로 하니까 내 몸은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다른 데보다 특히 목구멍과 기관지가 있는 앞가슴의 반발이 심했다. 눕기 직전에 내 생각에도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대를 부리긴 했다. 끊임없는 기침이 쏟아지면서 기관지 부근이 저려 왔다. 거기에다 오한이 나고 손과 발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사시나무 떨 듯 떨어 댔다. 마침내 나의 몸은 나의 명령을 기다리다 못해 스스로 ‘워’를 선언해버렸다. 그러고는 뻗어 버린 것이다. 속수무책, 겨우 뒷수습에 나선 나는 몇 군데 약속해놓았던 ‘일’의 중단을 선언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구들장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한 이틀, 문자 그대로 완전휴식이 들어가 말하자면 정신없이 앓았다. 그러고 나니 겨우 열이 가라앉으며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화가 이철수가 아침 재를 넘어 와서 보신탕을 나누었고 육신의 반란도 이쯤해서 끝나려는가 싶어, 눈치 보듯 지금 이 글을 쓴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적에 이렛날을 “거룩하게” 만드시고 그 날은 옹글게 쉬라고 명령하신 뜻을 이제 조금 알겠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성(聖)이라는 형용어가 붙은 것이 이렛날 곧 ‘쉬는 날’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메시지를 인간에게 암시해주고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온갖 생명체들 가운데 스스로 쉴 줄 모르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동물 밖에 없으리라. 왜 인간은 쉬지를 않는가? 누가 쉬지 못하게 강제하는가? 인간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인간을 쉴 줄 모르는 동물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또는 쉴 수 없도록 남에게 일을 강요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날마다 쉬지 않고 잡아 먹는다.
그러기에 병들어 눕는 것이 어쩌면 하늘이 마련한 최후의 은총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다른 치유책이 없을 때 훌륭한 의사는 독약을 쓴다. 맹렬한 산불을 잡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 맞불을 놓아 불을 삼키게 하는 것이듯이, 생명의 원리는 어쩔 수 없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인간에게 ‘질병’을 안겨주는 것이다. 과연 “병이 곧 치료”라는 말은 옳은 말이다.
안식일은 안식일 교도들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살아 남기 위하여 우리는 그 날의 뜻을 절실히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친구인 북산(北山)이 고급 등산화를 사서 보내 왔다. 나에게 그것은 그냥 가죽으로 만든 구두가 아니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경건하게 살펴보라는 간절한 메시지였다. 소도 사람도 ‘이랴’만으로는 부릴 수가 없는 법.
여기까지 쓰고 났는데 갑자기 우리 집 강아지 ‘꿈’이 어두워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짖어 댄다.
워 워 워...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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