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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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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78. 떠난 할머니, 떠난 할아버지
많이 아프시니 기도해 달라고 주보 광고란에 그렇게 쓴 주일, 그날 아침 변음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산중에 계시며 일력을 넘겨 주일을 확인하곤 몇 번이고 가쁜 숨을 쉬어 가며 그래도 제일 일찍 예배당 앞자리에 앉으시던 할머니, ‘기도빨’이 약해 하나님이 당신 기돈 잘 안 들으시는 것 같다며, 변화 없는 삶을 안타까지 여기시던 할머니.
심방오는 전도사 타 준다고 커피믹스를 사다 놓으신 할머니. 며칠 전 심방 같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와 함께 마당까지 나오셔 아쉬운 배웅을 했었는데.
셋째 아들인 반장님은 장례를 전통의식을 따라 하겠노라고, 죄송하지만 교회식으로 안하겠노라 했다. 지난번 큰형님 장례 때 울지도 못하게 했던 ‘교회식’이 떠올랐던 것이다.
뒤에서 돕기로 했다.
의식이야 어떻건, 그의 영혼일랑 하나님이 부르신 걸.
염과 입관예배를 부탁받고 당황했다. 몇 번 돕기는 했을 뿐, 나서서 해 본 경험이 없었다. 교우들도 경험자는 없었다. 얘기를 들은 헌영이 밤늦게 들어왔다. 친구의 정이 깊고 고맙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정성스레 할머니를 모셨다.
평온한 얼굴.
대체 죽음이란 무엇인지.
장지로 향하는 좁은 산길, 상여는 어렵게 산을 올랐다.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 할머니는 거기에 묻히셨다. 하관할 때 통곡하던 유족들, 누구라도 후회스러우리라. 더욱이 산중 외롭게 계시던 할머니였음에. 그렇게 울부짖는 자식들을 두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먼저 보내는 할아버지는 한쪽 편 조용하셨다.
망연한 눈빛, 그 모습이 울음보다 더 슬펐다.
관이 내려지고 관 옆에 흙이 채워졌을 때, 그제야 가까이 다가온 할아버지는 속 윗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셨는데 비녀였다.
평소 할머니가 머리 단장할 때 쓰시던 은비녀.
할아버지는 힘없이 툭 은비녀를 떨구셨다. 눈물처럼.
하관예배를 드릴 때, 할아버지는 무릎을 꿇으셨고 끝내는 눈물을 흘리고 마셨다. 할아버지, 언제라도 흐트러짐 없으시던 할아버지. 주름진, 그러나 언제라도 따뜻한 얼굴로 한평생 삶을 살아온 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던 할아버지.
슬픔 견디시다 끝내 눈물 흘리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속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 본연의 슬픔의 표정이, 그리고 그 표정 속엔 왠지 모를 성(聖)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교회가 주관하지 않았을 뿐, 교회가 해야 할 바는 다 했다. 장례가 모두 끝난 후 둘째 아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인사를 한다. 무엇이 고맙다는 걸까? 취중이라 그랬을까?
미아중앙 청년들이 다시 한번 고맙다. 전깃불 없는 할머니의 밤을 위해 그들은 양초를 보냈고, 할머니는 내내 감사함으로 초를 아껴 키셨다. 그러다 한 개를 남기고 떠나신 것이다. 한 개 남은 양초. 작으면 작은 대로 넉넉한 사랑.
홀로 되신 할아버지를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이 모시고 갔다. 삼오제를 마치고 산간에 있던 짐을 트럭에 싣고 서울로 갔다.
한평생을 흙과 함께 지내오신 할아버지. 80이 넘으셨지만 지금도 근력이 좋으셔 지게 위 쌀 한가마 쯤 어렵지 않게 지시는 할아버지.
의무감 이었을까? 죄책감 이었을까? 답답해하실 게 자명한데 왜 뒤늦게 서울로 모시는 것인지. 남은 여생 슬픔을 잊고 흙과 함께 지내셨으면 했는데. 할머니 다니시던 예배당에 나와 할머니 지니셨던 믿음 이으셨으면 했는데, 살아온 한 평생의 삶, 두고두고 얘기 듣고 싶었는데.
“에미야, 난 그냥 살고 싶은데.” 떠나시기 전 셋째 며느리 집사님께 하신 말씀이란다. 눈물 그렁히 맺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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