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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7. 철 지난 달력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51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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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247.철 지난 달력

 

교우 가정이나 마을 분들 집에 들러보면 달력이 몇 달 지난 것이 그냥 걸려 있을 때가 있다. 때가 6월인데도 4, 5월치 달력이 걸려 있을 때도 있고, 어떤땐 아예 1, 2월치 것이 걸려 있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처음엔 그럴 때마다 지난 것을 뜯어내어 달을 맞춰 드리곤 했다. 마치 시계바늘이 틀린 시계에 시간을 바로 맞추듯,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그냥 바라보곤 만다. 그분들이 지난 달력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글씨를 못 읽는 탓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게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 글씨를 못 읽어도 계절별로 바꾸는 사진이나 그림을 새롭게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던 것이 달력을 넘겨 드리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달력을 넘기며 생각하니 정말로 어리석은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달력을 보고 날짜를 알지만 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달력이 아니라 자연 혹은 한평생 살아온 삶의 경험으로 때를 분간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야 말로 숫자로 때를 아는 것에 비해 얼마나 지혜롭고 또 정확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언제 모판을 만들어야 하는지, 언제 깨를 갈아야 하는지, 언제 콩을 심고, 언제 김을 매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거둬 들어야 하는지를 마을 사람들은 달력이 아니라 몸에 배인 느낌으로, 그리고 자연의 조심스러운 변화를 보고 정확히 아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들은 몸에 ‘철’이 든 분들이다. 몸에 ‘철’이 들어 몸으로 철(때)을 느끼고 아는 것이다. 어디 그것을 달력의 숫자로 때를 분별하는 것에 비교할까. 내가 부끄러웠고 그 뒤론 함부로 철 지난 달력에 손을 못댄다.

(얘기마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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