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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4. 어느 봄날 오후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419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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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074. 어느 봄날 오후


규성이네 못자리를 하는 날이다. 이런저런 일로 한나절을 분주하게 보내다 논으로 나갔다.
작실 아주머니들이 여러 명 모여 모판과 모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붉은 흙을 곱게 만들어 모판에 깔고 볍씨를 골고루 뿌린 후 모래로 살짝 덮어 모판을 만든다.
본래 쌀 미(米) 자는 八十八(88) 이라는 숫자가 합해져 된 것이고, 그 이유가 쌀을 먹으려면 여든여덟번 사람 손이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모판을 만드는 일은 일손이 꽤 많이 들었다.
층층이 쌓아놓은 모판을 논으로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한사람 거드는 것이 표가 날 정도로 일손은 달리고 있었다. 두 개씩 짝맞추어 길다랗게 놓이는 모판, 그런 길다란 줄이 어느덧 세 줄이다. 만만한 양이 아니었다.
“한 삼십마지기 될걸요.” 염태논과 신작로께 논, 그리고 새로 도지를 얻은 논까지 올해 짓는 벼농사가 족히 30마지기는 될거라 했다.
한겨울 서울에 나가 일당 육만원씩인가를 받고 일하다 들어온 병철씨, 그 일당이 농사일과 비교되어 어떻게 농사질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는데 그게 웬 쓸데적은 걱정이냐는듯 병철씨는 올해 논농사를 더 늘렸다.
우루과이라운든지 우라질라운든지 할테면 해봐라, 난 이 땅에서 굽힘 없이 농사를 질란다. 젊은 농사꾼의 오기였을까. 논농사 많이 지어 규성이 대학 공부 시킬란다고 껄껄 웃어대며 병철씬 여전히 모판을 정성스레 놓고 있 다.
말랑말랑한 흙. 맨발이면 맨발, 장화면 장화, 고무신이면 고무신을 그대로 박아내는 논둑의 말랑말랑한 흙, 예쁜 애기 빵 만들어 주려 엄마가 정성스레 빚어놓은 밀가루처럼, 아이들 즐겨먹는 마이구미 젤리처럼 곱고 부드러운 흙, 이런저런 얘기로 웃음꽃 피워내며 모판들고 논둑길을 오가는 어느 봄날 오후.(얘기마을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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