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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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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들을 보면 그 다양한 종류와 기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기기와 기기의 통합은 물론 한 기기 안에 들어가 있는 놀라운 기능 등, 나같이 기계와 유행에 둔감한 사람이 보기에는 출시되는 제품이 이미 내 생각을 훨씬 앞서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제품들이 먼저 나와 혹시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느냐며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와 카메라가 만나 고 작은 기기 안에 전화와 카메라라는 두 가지 기능이 다 들어있는 것만 해도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낼 수도 있다니, 생각이 이미 나와있는 기능조차 따라잡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능을 가진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거꾸로 점점 사라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눈부신 발전과는 다르게 갈수록 부족해지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비심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갑니다. 불쌍한 사람을 가혹하게 왕따를 시키면 시켰지 그의 처지를 이해하며 불쌍히 여기려는 마음은 갈수록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자비라는 말은 몇 몇 종교의 시대에 뒤떨어진 빛 바랜 교리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자비'(compassion)라는 말은 '함께'(com)라는 말과 '고통'(passion)이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자비를 독일어로는 '미트라이트'(mitleid)라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드'(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비'입니다.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우애가 좋은 오누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큰 교통 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급히 피가 필요했습니다. 오빠와 같은 혈액형을 가진 다섯 살 딸을 향해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오빠가 위험하구나. 오빠에게 피를 줄 수 있겠니?"
아이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술을 앞둔 오빠가 불쌍했던지 눈물을 흘리면서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던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 죽어요?"
"네가 죽다니?"
"피를 뽑아도 죽지 않나요?"
어린 동생은 자신의 피를 뽑으면 자신은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빠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주었던 것이었죠.
갈수록 메말라 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주 단순한 사실, 사람과 자연을 향해 이 자비심을 회복하는데 달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4.8.15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휴대전화와 카메라가 만나 고 작은 기기 안에 전화와 카메라라는 두 가지 기능이 다 들어있는 것만 해도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낼 수도 있다니, 생각이 이미 나와있는 기능조차 따라잡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능을 가진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거꾸로 점점 사라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눈부신 발전과는 다르게 갈수록 부족해지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비심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갑니다. 불쌍한 사람을 가혹하게 왕따를 시키면 시켰지 그의 처지를 이해하며 불쌍히 여기려는 마음은 갈수록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자비라는 말은 몇 몇 종교의 시대에 뒤떨어진 빛 바랜 교리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자비'(compassion)라는 말은 '함께'(com)라는 말과 '고통'(passion)이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자비를 독일어로는 '미트라이트'(mitleid)라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드'(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비'입니다.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우애가 좋은 오누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큰 교통 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급히 피가 필요했습니다. 오빠와 같은 혈액형을 가진 다섯 살 딸을 향해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오빠가 위험하구나. 오빠에게 피를 줄 수 있겠니?"
아이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술을 앞둔 오빠가 불쌍했던지 눈물을 흘리면서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던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 죽어요?"
"네가 죽다니?"
"피를 뽑아도 죽지 않나요?"
어린 동생은 자신의 피를 뽑으면 자신은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빠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주었던 것이었죠.
갈수록 메말라 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주 단순한 사실, 사람과 자연을 향해 이 자비심을 회복하는데 달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4.8.15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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