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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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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이 이른 시간에 누구일까 싶어 조심스런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더니 규민이었다. 소리, 규민, 규영이 모두 학교를 가기 위해 전차를 타러나갔고 한참 학교로 가고 있을 시간인데 전화를 하다니, 뜻밖이었다.
"웬일이니?"
걱정이 되어 물었더니 갈아타야 할 전차가 늦게 온다고 방송을 했단다.
아이들은 아침 6시 40분쯤 집에서 나가 교회 옆에 있는 '중앙공동묘지역'(Hauptfriedhof)에서 전차 5번(U5)을 타고 'Hauptwache역'이나 '중앙역'(Hauptbahnhof)에서 내려 S-Bahn(S3)으로 갈아탄다. S3번을 타고 '슈발바흐(Schwalbach)역'에 내려 학교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린다.
U5 전차는 차편이 자주 있어 별 문제가 없는데, 갈아타야 하는 S3 전차는 30분에 한 대 꼴로 다닌다. 그러니 시간에 맞춰나가도 S3번이 늦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중앙공동묘지역'(Hauptfriedhof)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내가 차로 데려다 주면 교회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불과 20분 거리, U5번이 자주 있으니 차라리 되돌아오면 내가 나가 기다리고 있다 데려다 주는 것이 지각을 면하는 길이지 싶었다. 아이들은 다시 전차를 타고 되돌아왔고, 나는 길옆에 차를 세워놨다가 아이들을 태우고 학교로 달렸다.
학교로 가며 들으니 그동안에도 몇 번 S3번 전차가 늦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괜히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독일에 온지 3년, 그동안 3번 이사를 하였다. 교회 지하에서 쏘센하임으로, 쏘센하임에서 슈발바흐로, 슈발바흐에서 다시 교회로, 교회가 회복되는 과정을 따라 이사를 했는데,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이들이었다.
낯선 나라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해나가야 하는 아이들로선 안정된 생활이 무엇보다 필요할 텐데 익숙해질만 하면 이사를 가야 했으니, 아이들로서는 몹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겨우 친구가 생겨 집에 놀러오고 밖에 나가서 놀 때쯤 되면 그곳을 떠나야 했으니, 그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그러다 정착한 곳이 슈발바흐, 쏘센하임 아파트에 문제가 생겨 그곳을 떠나며 아이들을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걸어서 다닐 수가 있는 곳, 그나마 아이들을 위해 다행이다 싶었는데 꼭 일년만에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전차를 바꿔 타며 한 시간 여 학교까지 통학을 해야 한다. 이른 시간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어두컴컴한 길을 나서야 한다.
목사인 나야 교회형편을 따라 이렇게 저렇게 선택을 한다 하지만 목사를 아빠로 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일까, 용돈이 있는지 묻는 것만으로는 미안함이 쉬 지워지지 않았다. 2004.12.5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웬일이니?"
걱정이 되어 물었더니 갈아타야 할 전차가 늦게 온다고 방송을 했단다.
아이들은 아침 6시 40분쯤 집에서 나가 교회 옆에 있는 '중앙공동묘지역'(Hauptfriedhof)에서 전차 5번(U5)을 타고 'Hauptwache역'이나 '중앙역'(Hauptbahnhof)에서 내려 S-Bahn(S3)으로 갈아탄다. S3번을 타고 '슈발바흐(Schwalbach)역'에 내려 학교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린다.
U5 전차는 차편이 자주 있어 별 문제가 없는데, 갈아타야 하는 S3 전차는 30분에 한 대 꼴로 다닌다. 그러니 시간에 맞춰나가도 S3번이 늦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중앙공동묘지역'(Hauptfriedhof)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내가 차로 데려다 주면 교회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불과 20분 거리, U5번이 자주 있으니 차라리 되돌아오면 내가 나가 기다리고 있다 데려다 주는 것이 지각을 면하는 길이지 싶었다. 아이들은 다시 전차를 타고 되돌아왔고, 나는 길옆에 차를 세워놨다가 아이들을 태우고 학교로 달렸다.
학교로 가며 들으니 그동안에도 몇 번 S3번 전차가 늦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괜히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독일에 온지 3년, 그동안 3번 이사를 하였다. 교회 지하에서 쏘센하임으로, 쏘센하임에서 슈발바흐로, 슈발바흐에서 다시 교회로, 교회가 회복되는 과정을 따라 이사를 했는데,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이들이었다.
낯선 나라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해나가야 하는 아이들로선 안정된 생활이 무엇보다 필요할 텐데 익숙해질만 하면 이사를 가야 했으니, 아이들로서는 몹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겨우 친구가 생겨 집에 놀러오고 밖에 나가서 놀 때쯤 되면 그곳을 떠나야 했으니, 그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그러다 정착한 곳이 슈발바흐, 쏘센하임 아파트에 문제가 생겨 그곳을 떠나며 아이들을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걸어서 다닐 수가 있는 곳, 그나마 아이들을 위해 다행이다 싶었는데 꼭 일년만에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전차를 바꿔 타며 한 시간 여 학교까지 통학을 해야 한다. 이른 시간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어두컴컴한 길을 나서야 한다.
목사인 나야 교회형편을 따라 이렇게 저렇게 선택을 한다 하지만 목사를 아빠로 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일까, 용돈이 있는지 묻는 것만으로는 미안함이 쉬 지워지지 않았다. 2004.12.5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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