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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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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인가 97년인가부터 <교차로>에 칼럼을 쓰고 있다. <교차로>는 한국의 길거리에서 흔히 보게 되는 생활정보지다. 얼마 전에 아주대학교에 시가 200억 원이 넘는 주식을 기부한 황필상 박사가 시작했다고 들었다.
처음엔 3개월 정도 써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니 나도 참 무던한 셈이다. 처음 칼럼을 쓸 때만 해도 필진이 황필상 씨와 김진홍 목사 그리고 나 세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정신과의사인 이시형 박사가 합류하고, 지금은 불교대 대표를 포함한 9명이 필진으로 일하고 있다. 곳곳에 고정독자도 있어 즐거운 반향을 접하게도 된다. 한 번은 캐나다에 사는 이가 칼럼을 읽고서 전화를 하기도 했으니 폭도 넓은 셈이다.
목사가 생활정보지에 칼럼을 쓰다니, 어찌 보면 생뚱맞게 여겨진다. 처음에 원고를 쓸 때 테너 박인수 씨를 생각했다. 가수 이동원 씨와 함께 부른 '향수' 때문이었다. 서울대 음대 교수면서도 가수와 함께 가요를 불렀던 그의 모습이 신선하고 의미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하나님'이란 말을 하지 않으면서 그 분에 대해 이야기하기, 내가 쓰는 <교차로> '아름다운 사회' 칼럼의 의미는 '신앙과 세상 사이의 다리 놓기'였다.
발행부수로 보자면 조선일보보다 많다는, 읽고는 휴지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여도 생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나는 방편이니 대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도구 아니겠는가. 지금도 나는 주변 삶을 눈여겨보며 함께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곤 한다.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는 선생님이 며칠 전 새해인사 삼아 메일을 보내셨다. 제법 긴 이야기를 마치며 선생님은 이렇게 인사를 하셨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늘 아름다우십시오.
목사님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사람은 단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교우들만이 아니고 나처럼 어쭙잖은 갓길에서 곁눈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라도 목사님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이셔야 합니다."
선생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늘 나의 '좁음'이 마음에 걸린다.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한 신앙인으로서도 그렇고, 교회를 섬기는 한 목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자신의 좁다란 세계에 갇혀 그게 전부라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말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경계를 언제 누구에게라도 툭 허물어 흔쾌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이 땅에 두 발 딛고 서서 편견 없이 사물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 속에 오롯이 그 분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조금 느낄 뿐, 좁음에 갇히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도 때로 그런 부족한 삶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없진 않다. 나는 내 좁음이 마음에 걸리고 부끄러운데, 그 좁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넓음으로 생각하기도 하니 참으로 묘한 생각의 간극이 아닐 수가 없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되며, 다른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진다."(도로테오), 2005.1.13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처음엔 3개월 정도 써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니 나도 참 무던한 셈이다. 처음 칼럼을 쓸 때만 해도 필진이 황필상 씨와 김진홍 목사 그리고 나 세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정신과의사인 이시형 박사가 합류하고, 지금은 불교대 대표를 포함한 9명이 필진으로 일하고 있다. 곳곳에 고정독자도 있어 즐거운 반향을 접하게도 된다. 한 번은 캐나다에 사는 이가 칼럼을 읽고서 전화를 하기도 했으니 폭도 넓은 셈이다.
목사가 생활정보지에 칼럼을 쓰다니, 어찌 보면 생뚱맞게 여겨진다. 처음에 원고를 쓸 때 테너 박인수 씨를 생각했다. 가수 이동원 씨와 함께 부른 '향수' 때문이었다. 서울대 음대 교수면서도 가수와 함께 가요를 불렀던 그의 모습이 신선하고 의미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하나님'이란 말을 하지 않으면서 그 분에 대해 이야기하기, 내가 쓰는 <교차로> '아름다운 사회' 칼럼의 의미는 '신앙과 세상 사이의 다리 놓기'였다.
발행부수로 보자면 조선일보보다 많다는, 읽고는 휴지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여도 생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나는 방편이니 대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도구 아니겠는가. 지금도 나는 주변 삶을 눈여겨보며 함께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곤 한다.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는 선생님이 며칠 전 새해인사 삼아 메일을 보내셨다. 제법 긴 이야기를 마치며 선생님은 이렇게 인사를 하셨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늘 아름다우십시오.
목사님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사람은 단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교우들만이 아니고 나처럼 어쭙잖은 갓길에서 곁눈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라도 목사님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이셔야 합니다."
선생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늘 나의 '좁음'이 마음에 걸린다.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한 신앙인으로서도 그렇고, 교회를 섬기는 한 목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자신의 좁다란 세계에 갇혀 그게 전부라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말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경계를 언제 누구에게라도 툭 허물어 흔쾌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이 땅에 두 발 딛고 서서 편견 없이 사물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 속에 오롯이 그 분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조금 느낄 뿐, 좁음에 갇히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도 때로 그런 부족한 삶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없진 않다. 나는 내 좁음이 마음에 걸리고 부끄러운데, 그 좁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넓음으로 생각하기도 하니 참으로 묘한 생각의 간극이 아닐 수가 없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되며, 다른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진다."(도로테오), 2005.1.13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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