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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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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권위 있는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라모네 편집인은 7월호 커버스토리로 한국과 관련된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기사의 제목은 '한국에 내려진 경보'였는데, 기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관주의, 한국의 정계 인사나 노조 책임자들과 얘기를 나눌 때 이런 정서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너무 가까운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먼 것이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깝고 익숙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고의로 험담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거울이 될 수가 있을 테니까요.
'비관주의'라는 말이 조금은 지나치게 들리긴 하지만,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어두운 면이 라모네 편집인의 눈에 그렇게 비쳐진 것이지 싶습니다. 패배감과 좌절감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그는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잔 카를로 메노티는 "내게 지옥의 의미는 '너무 늦었어'라는 두 단어에 담겨 있다."고 했는데, 별 뵤족한 대책이 없다는 실망과 좌절감이 잘못 먹은 음식 체하듯 서로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내면의 모습 아닐까 싶습니다.
한 외국 잡지에서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우리의 부정적인 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정말로 비관주의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잘못된 흐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바꿀 수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모습이 대추나무에 연 걸린 형국이라면 그럴수록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일 터인데, 과연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일지요?
엉뚱하지만 가로등 생각을 해봅니다. 가로등을 가장 먼저 시작한 이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합니다. 캄캄한 밤 집 밖에 등 하나 내다 걸었던 것이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프랭클린의 집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등불이 환하게 켜 있는 것을 보고 참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 사람씩 자기 집 앞에도 등불을 켜서 달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죠. 프랭클린은 가로등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법안을 만들거나 광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집에 등불 하나를 내걸었을 뿐이지만 소중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지는 길밖엔 없는 것 아닐까요? 정부나 정책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벌금이나 상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가로등 내걸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이 깨어나는 일, 바로 나부터 달라지는 일에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 달려있지 싶습니다. 2005.7.7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사실 너무 가까운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먼 것이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깝고 익숙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고의로 험담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거울이 될 수가 있을 테니까요.
'비관주의'라는 말이 조금은 지나치게 들리긴 하지만,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어두운 면이 라모네 편집인의 눈에 그렇게 비쳐진 것이지 싶습니다. 패배감과 좌절감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그는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잔 카를로 메노티는 "내게 지옥의 의미는 '너무 늦었어'라는 두 단어에 담겨 있다."고 했는데, 별 뵤족한 대책이 없다는 실망과 좌절감이 잘못 먹은 음식 체하듯 서로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내면의 모습 아닐까 싶습니다.
한 외국 잡지에서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우리의 부정적인 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정말로 비관주의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잘못된 흐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바꿀 수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모습이 대추나무에 연 걸린 형국이라면 그럴수록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일 터인데, 과연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일지요?
엉뚱하지만 가로등 생각을 해봅니다. 가로등을 가장 먼저 시작한 이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합니다. 캄캄한 밤 집 밖에 등 하나 내다 걸었던 것이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프랭클린의 집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등불이 환하게 켜 있는 것을 보고 참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 사람씩 자기 집 앞에도 등불을 켜서 달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죠. 프랭클린은 가로등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법안을 만들거나 광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집에 등불 하나를 내걸었을 뿐이지만 소중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지는 길밖엔 없는 것 아닐까요? 정부나 정책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벌금이나 상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가로등 내걸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이 깨어나는 일, 바로 나부터 달라지는 일에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 달려있지 싶습니다. 2005.7.7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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