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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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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일들이 많았지만, 지난 한 주 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며 훈훈했던 것은 우연처럼 듣게 된 한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런 이야기는 그분들의 삶과 그분들이 돌아서는 모습을 생각하면 알려지지도 말았어야 할 일이었으나, 그래도 다행히 전해져 마음을 덥혀주니 고마울 뿐입니다.
두 수녀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분들의 고국은 오스트리아, 옛 사람들이 오지리(墺地利)라 불렀던 유럽의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마리안네 스퇴거, 마가레트 피사렉, 두 분의 이름도 낯섭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님은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을 소속 수녀회를 통해 듣고는 한국을 찾게 됩니다.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 그곳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 지도상의 거리보다도 마음의 거리가 더 멀었던 소록도로 두 수녀님이 찾아온 것이 1962년과 1966년, 그리고는 섬을 떠나지 않았으니 소록도에서 지낸 세월이 어느새 40년이 넘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길지 않음을 생각할 때 40년 세월의 무게가 결코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두 분은 섬에 발을 디딘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니, 세상에 그보다 따뜻하고 고마운 손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날 때면 죽을 쑤고 과자를 구워 마을을 돌았고,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 하여 마지못해 받았던 월 10만원의 식비는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도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여비로 나누어주었고,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하고....., 섬사람들이 소중하게 기억하는 두 분의 삶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삶이 행여 밖으로 알려질까 그동안 어떤 상이나 인터뷰도 번번이 물리쳐, 10여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건넬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변함없는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두 수녀님 나이가 일흔이 넘게되자,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며,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며 두 분은 새벽같이 섬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 짧은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40여 년 전 소록도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만을 들고서 도망치듯 떠났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삶과 믿어지지 않는 떠남, 그들이 남긴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들이 떠난 슬픔이 너무나 커서 소록도 섬사람들은 열흘이 넘도록 성당과 치료소에 모여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 평생의 삶을 이국의 외딴섬 나환자들과 함께 한 지극한 사랑, 섬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합니다. '할매'라는 말을 대하는 순간 울컥 솟는 뜨거운 눈물이라니요! 하느님이 소록도에서 '할매'라는 정겨운 우리 이름을 얻으셨지 싶어 축하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답니다. 2005.12.17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두 수녀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분들의 고국은 오스트리아, 옛 사람들이 오지리(墺地利)라 불렀던 유럽의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마리안네 스퇴거, 마가레트 피사렉, 두 분의 이름도 낯섭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님은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을 소속 수녀회를 통해 듣고는 한국을 찾게 됩니다.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 그곳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 지도상의 거리보다도 마음의 거리가 더 멀었던 소록도로 두 수녀님이 찾아온 것이 1962년과 1966년, 그리고는 섬을 떠나지 않았으니 소록도에서 지낸 세월이 어느새 40년이 넘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길지 않음을 생각할 때 40년 세월의 무게가 결코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두 분은 섬에 발을 디딘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니, 세상에 그보다 따뜻하고 고마운 손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날 때면 죽을 쑤고 과자를 구워 마을을 돌았고,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 하여 마지못해 받았던 월 10만원의 식비는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도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여비로 나누어주었고,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하고....., 섬사람들이 소중하게 기억하는 두 분의 삶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삶이 행여 밖으로 알려질까 그동안 어떤 상이나 인터뷰도 번번이 물리쳐, 10여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건넬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변함없는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두 수녀님 나이가 일흔이 넘게되자,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며,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며 두 분은 새벽같이 섬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 짧은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40여 년 전 소록도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만을 들고서 도망치듯 떠났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삶과 믿어지지 않는 떠남, 그들이 남긴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들이 떠난 슬픔이 너무나 커서 소록도 섬사람들은 열흘이 넘도록 성당과 치료소에 모여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 평생의 삶을 이국의 외딴섬 나환자들과 함께 한 지극한 사랑, 섬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합니다. '할매'라는 말을 대하는 순간 울컥 솟는 뜨거운 눈물이라니요! 하느님이 소록도에서 '할매'라는 정겨운 우리 이름을 얻으셨지 싶어 축하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답니다. 2005.12.17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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