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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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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9 그랭이질이 아쉽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동안 자동차에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취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공감을 하면서도 그 일과 관련하여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는데,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뒷부분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내 탓이라는 마음에서라면 당연히 스티커를 운전석 앞에 붙이고 남의 탓을 하기 전 먼저 자신의 잘못을 헤아리는 마음이 필요할 터인데, 무슨 생각에선지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뒤에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뒤에 붙이면 그 글을 읽게 되는 것은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의 운전사가 아니라 뒤에서 따라오는 차의 운전사가 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운전사가 앞 차 뒤꽁무니에 붙은 그 글을 읽으면 글이야 ‘내 탓이오’로 읽지만,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앞 차가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네 탓이오’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고, 무책임한 세태를 날카롭게 지적한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잃은 자가 없다는 것은, 되어진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기둥을 맨땅 위에 세울 수는 없었으니까요. 기둥은 반드시 주춧돌 위에 세워 나무로 된 기둥이 비나 습기에 상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주춧돌은 그저 생긴 그대로의 펑퍼짐한 돌을 구해 사용했습니다. 얼핏 주춧돌은 바닥이 반반해야만 쓸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꼭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써도 기둥을 세우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바로 그랭이질 때문이었습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을 제대로 세우려면 돌을 반반하게 깎아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돌을 다루기보다는 나무를 다루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돌을 깎아내는 대신 돌의 생긴 모양을 따라 나무 기둥의 밑동을 파내면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그랭이질이라 불렀는데, 생각해보면 간단하면서도 절묘한 이치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돌과 나무라는 성질이 아주 다른 두 재료를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그랭이질이었습니다. 그랭이질이 제대로 된 두 개의 기둥 위에 널판을 얹으면 그 위를 목수들이 올라가 걸어 다녀도 무너지지를 않았다하니 감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새삼 그랭이질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그랭이질에 달려있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서로가 하나가 되기 위해 내가 나를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하는 것,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진정한 그랭이질에 달려있지 싶습니다. 내가 나를 깎아내지 않고서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말은 ‘내 탓이오’ 하면서도 실제로는 ‘네 탓이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2006.8.28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동안 자동차에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취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공감을 하면서도 그 일과 관련하여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는데,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뒷부분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내 탓이라는 마음에서라면 당연히 스티커를 운전석 앞에 붙이고 남의 탓을 하기 전 먼저 자신의 잘못을 헤아리는 마음이 필요할 터인데, 무슨 생각에선지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뒤에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뒤에 붙이면 그 글을 읽게 되는 것은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의 운전사가 아니라 뒤에서 따라오는 차의 운전사가 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운전사가 앞 차 뒤꽁무니에 붙은 그 글을 읽으면 글이야 ‘내 탓이오’로 읽지만,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앞 차가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네 탓이오’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고, 무책임한 세태를 날카롭게 지적한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잃은 자가 없다는 것은, 되어진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기둥을 맨땅 위에 세울 수는 없었으니까요. 기둥은 반드시 주춧돌 위에 세워 나무로 된 기둥이 비나 습기에 상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주춧돌은 그저 생긴 그대로의 펑퍼짐한 돌을 구해 사용했습니다. 얼핏 주춧돌은 바닥이 반반해야만 쓸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꼭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써도 기둥을 세우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바로 그랭이질 때문이었습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을 제대로 세우려면 돌을 반반하게 깎아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돌을 다루기보다는 나무를 다루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돌을 깎아내는 대신 돌의 생긴 모양을 따라 나무 기둥의 밑동을 파내면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그랭이질이라 불렀는데, 생각해보면 간단하면서도 절묘한 이치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돌과 나무라는 성질이 아주 다른 두 재료를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그랭이질이었습니다. 그랭이질이 제대로 된 두 개의 기둥 위에 널판을 얹으면 그 위를 목수들이 올라가 걸어 다녀도 무너지지를 않았다하니 감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새삼 그랭이질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그랭이질에 달려있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서로가 하나가 되기 위해 내가 나를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하는 것,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진정한 그랭이질에 달려있지 싶습니다. 내가 나를 깎아내지 않고서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말은 ‘내 탓이오’ 하면서도 실제로는 ‘네 탓이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2006.8.28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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