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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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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중 가장 큰 불행으로 남아있지 싶은 히틀러의 만행과 관련, 늘 궁금하게 여겨지던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당시의 독일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말로 몰랐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실패한 화가이고 실패한 건축가였던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좌절로 인한 질투심을 쏟아 부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히틀러가 가지고 있었던 전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유대인들을 통해 쏟아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서 비롯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적대감을 히틀러가 교묘하게 유대인들에게 돌렸다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역사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벌이고 있는 만행을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요? 당시 나치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고, 대량 학살과 관련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강구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인들은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내 수용소 중의 하나였던 부헨발트의 생존자로 나중에 뮌헨 대학 정치학과 교수가 된 오이겐코곤에 따르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알고 있는 판사, 경찰, 변호사, 성직자, 사회복지사의 수가 수천을 헤아렸습니다. 독일의 많은 대기업이 포로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대학의 교수들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힘러가 만든 의학연구소와 협동 연구를 했고, 국가소속 의사와 개인 병원 의사들이 전문적인 살인자들과 협력을 했습니다. 많은 군인들도 곳곳에서 얼마나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었고,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직접 죄를 지어서 만이 아니라 나는 모른다는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더 큰 죄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입니다.
나만 편하고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고의적인 태만과 무관심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어느 날 문득 그 죄의 결과가 우리를 덮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7.1.27ⓒ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실패한 화가이고 실패한 건축가였던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좌절로 인한 질투심을 쏟아 부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히틀러가 가지고 있었던 전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유대인들을 통해 쏟아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서 비롯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적대감을 히틀러가 교묘하게 유대인들에게 돌렸다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역사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벌이고 있는 만행을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요? 당시 나치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고, 대량 학살과 관련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강구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인들은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내 수용소 중의 하나였던 부헨발트의 생존자로 나중에 뮌헨 대학 정치학과 교수가 된 오이겐코곤에 따르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알고 있는 판사, 경찰, 변호사, 성직자, 사회복지사의 수가 수천을 헤아렸습니다. 독일의 많은 대기업이 포로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대학의 교수들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힘러가 만든 의학연구소와 협동 연구를 했고, 국가소속 의사와 개인 병원 의사들이 전문적인 살인자들과 협력을 했습니다. 많은 군인들도 곳곳에서 얼마나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었고,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직접 죄를 지어서 만이 아니라 나는 모른다는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더 큰 죄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입니다.
나만 편하고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고의적인 태만과 무관심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어느 날 문득 그 죄의 결과가 우리를 덮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7.1.27ⓒ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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