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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순간들

이해인 이해인............... 조회 수 2828 추천 수 0 2008.06.20 19: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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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804

아름다운 순간들

1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깊이 음미하지도 못한 채 그냥 그냥 지나쳐버릴 때가 많은 것 같다. 사람마다 자기가 체험하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적어 두는 수첩이라도 있으면 어떨까?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듣게 되는 이웃의 어떤 표정, 말씨, 마음씨, 자연의 한 장면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음으로 삶의 한 순간을 밝혀줄 수 있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음은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발견하고, 맛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아름다움의 힘을 더욱 깊이 알아듣게 되겠지.  

2.
밤새 심한 태풍이 불던 다음 날, 정원의 수많은 백합들이 거의 다 못쓰게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아침에 창을 열었을 때, 얼굴 하나 안 상하고 웃어주던 그 하얀 꽃들의 얼굴, 얼굴, 그 고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정말 신기하지요?" 우리는 몇 번이나 수녀원 안뜰에 나가 태풍에도 잘 견디어 낸 꽃들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3
점심 식사 후에 잠시 다녀온 오늘의 바다 빛깔은 특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함께 산책을 나간 분으로부터 '엄마, 파도는 모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밀려오는 거지?' 했다는 어느 어린이의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어린이야말로 천재적인 시인이라는 생각이 더욱 새롭다.

4.
오늘 산책길에서 마주친 한 마리 고운 새의 이름을 찾아야겠다. 인기척에 놀라 금방 도망갈지 모르니 좀 더 우리 수녀원 산길에서 놀다 갈 수 있도록 다른 길로 돌아가자며 내 팔을 잡아끌던 동료 수녀의 그 마음씨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늘고 여린 그의 음성이 내 안에 고운 새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

5.
며칠 전에 경은이가 가져온 분홍 갑사 주머니 안의 나팔꽃씨를 머리맡에 두고 자니 내 침대가 꽃밭이 되는 것만 같다. 종이봉투나 비닐봉지에 넣지 않고 일부러 헝겊 주머니를 만들어 꽃씨를 넣어 보낸 사람의 그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6.
비오는 날의 여행길에서 돌아온 어느 저녁, 나는 잔뜩 흙 묻은 신발을 미처 닦을 틈도 없이 아침을 맞이했는데 누군가 깨끗이 닦아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속으로 짐작되는 이가 있어 대뜸 '이 신발 수녀님이 닦았지요?' 했더니 아무 대답도 없이 씨익 웃기만 하던 그 젊은 후배 수녀의 은은한 아름다움이 한 촉의 난(蘭)의 향기로 내게 머문다.

7.
임종이 가까울 만큼 위독한 상태에서도 가벼운 병으로 옆 침대에 입원해 있는 나를 더욱 걱정하며 지켜봐 주시던 그 사랑 많은 노(老) 수녀님을 잊을 수 없다. 수녀님의 묘지에 오를 때마다 그 분처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무척 부끄럽다. '풀은 무덤 위에 아름답게 자라난 머리카락인 듯도 하다'는 휘트먼의 <풀잎>의 한 구절을 뇌어보는 수녀원 묘지 위에서의 쓸쓸한 아름다움.

8
수녀들이 각자의 일터에서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신생아실에서 일하면요, 아기들의 울음소리에서 생명을 느껴요. 그런데 부모가 사이 좋고 정상적인 관계인 아기들은 울음소리도 너무 크고 우렁찬 데 비해서 미혼모의 아기들은 울음소리부터가 너무 작고 힘이 없어 불쌍해요'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수녀도 있고, '염소를 키워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이번에 또 새끼를 낳았는데 구경하러 오세요' 하는 이도 있고, '오늘 먹은 호박은 제가 농사지은 것입니다. 올해는 호박이 몇 백 개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 하는 이도 있고 '몹시 편찮으신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하는 양로원의 수녀, '가출한 우리 반 학생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하는 교사 수녀 등등 소임의 종류만큼 이야기도 다양하다.
수녀들 각자가 표현하는 기쁨, 슬픔, 근심은 어느새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니 우리의 '기도의 일' 또한 끝이 없다.

9.
손님이 자주 드나드는 객실에 다 쓰고 난 잉크병을 씻어 그 안에 하얀 자갈을 깔고 살짝 꽃아 놓은 들꽃 한 송이를 보고 또 보며 기뻐하는 나를 보고, 객실 담당자로서의 흐뭇한 보람을 환한 웃음으로 표현하는 듯한 어느 예비수녀의 그 모습이 작은 들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답다.

10.
'추억은 우리의 교양 있는 분별력으로 정도가 알맞아야 한다. 감사와 기쁨으로 추억을 간직하는 것과 거기에 묶인 채로 남아 있는 것 사이에는 삶과 죽음만 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추억을 감사하게 간직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움켜쥐고 여전히 무엇을 구하면 우리는 비현실과 신경쇠약에 빠지게 되고 당장에 사람들은 우리의 인격을 의심하게 된다.'
10년도 더 된 나의 옛 노트에서 발견한 유진 프라이스의 이 말이 오늘따라 더 가까이 들린다.
나이 들수록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추억의 노예가 되기 쉽고, 추억을 밑거름으로 전진하기보다는 그대로 그 안에 갇혀 비현실적이 될 때가 많은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추억이야말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면 추억을 잘 가꾸고 다스리는 일 또한 그리 만만치 않다.

11.
매일 오후 두 시경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수녀원에 오는 집배원 아저씨를 위해 벌써 몇 년째 한결같은 정성으로 간식을 준비하며, 그 분을 가족처럼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단아한 칠순 수녀님의 모습은 늘 아름답고 따뜻하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잎들을 객실의 유리 접시나 재떨이에 띄워놓기도 하고, 솔방울이나 낙엽들을 주워다 장식할 줄도 아시는 다정하고 해맑은 할머니 수녀님은 모든 손님들을 늘 기쁘게 하시니 우리 객실의 '고운 해님'임에 틀림없다.

12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신으려고 현관에 나가면 누군가 어느새 내가 신는 쪽으로 가지런히 돌려놓는 정성에 고마움을 느끼며 나도 다른 이의 신발을 돌려놓게 된다.
'따뜻이 안아줄 줄 안다. 내 신발
너는 보잘것도 없이
추운 뜨락에서 잠들지만
나의 무딘 발이 네게로 불쑥 찾아들었을 땐
너는 어김없이 그랬다.
어머니가 안아주시듯
그렇게 내 발을 포옥 껴안았다.
권영상님의 <신발>이란 동시를 외우며 신발을 신노라면 한결 더 정답고 따뜻해 보이는 한 켤래의 나의 신발.  

13.
오늘은 미국 캔터키,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하롤드 수사님의 글을 받았다. 하얀 수도복에 검은 성의를 걸쳐 팽귄새의 모습을  연상케도 했던 그 분이 지난 겨울, 여행 중에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나는 통도사의 어느 암자로 그를 안내했었는데 그곳 ㅂ 스님의 환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눈이 푸른 외국인과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그 스님은 처음 보는 손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듯 했다. 손님이 작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자 즉시 고운 한지에 그것을 선물로 싸 주었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 필름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즉시 방에 들어가 스님의 카메라 안에 들어있는 필름을 꺼내 '다행히 아직 쓰지 않았다'며 건네 주었다.
손님맞이를 그저 적당히, 소극적으로 하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다 해 하는 ㅂ 스님의 모습에서 나는 늘 '깨어 살아 열려 있는' 구도자의 민감성을 읽었다.

14
만 25년 만에 만난 나의 국민학교 동창생이 대뜸 '얘, 난 먼 나라에서도 네가 쓴 글을 종종 읽어보았는데 전부 다 내가 쓴 것으로 착각이 들곤 한단다. 괜찮지?' 하며 어릴 때와 변함 없이 밝고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답고 다정했다. '너도 다 잊어버렸지? - 별을 보며 주고 받던 고운 이야기 깨어보니 꿈이었구나 -이건 네가 국민학교 때 내게 적어주었던 최초의 글이야' 하며 반가움에 눈물 글썽이던 벗 현숙. 내게는 필요도 없는 알록달록한 고운 돌멩이 액서서리(팔찌)를 상징적으로 받으라며 떼를 쓰던 친구. 내가 즐겨 싸 가던 도시락 반찬 중 감자볶음은 자기가 더 많이 먹었다면서 깔깔대던 그의 상냥한 웃음과 목소리에서 나는 초록으로 철랑이는 동심의 노래를 들었다. 어릴 적 동무들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치자꽃처럼 향기롭게 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15.
오늘 아침, 미사 때 들은 ㅌ 수녀님의 플롯 연주는 아름다웠다. 오늘처럼 비 오는 여름날은 목관악기 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어도 좋고, 요한스트라우스의 왈츠곡을 들으며 춤추는 마음이 되어도 좋으리라. 형편상 자주 듣는 편이 못되지만 아름다운 음악은 그대로 아름다운 기도이다.

16
생일을 맞는 이에게 주려고 오늘은 분꽃씨를 따서 고운 봉지에 담아 두었다. 우리가 서로 꽃씨를 선물로 주고받고,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은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인지!
지난 봄에 내가 선물로 받아 뿌린 나팔꽃씨에서 꽃잎이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붉은 꽃, 보라색 꽃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열고 있다.

17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 산천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여행은 역시 기차여행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나는 가고 있다. 모든 고요한 시골 지방들을 통과하며...' '신(神)이시여 나를 여기가지 싣고 온 이 기차를 축복하소서' 라고 노래했던 조이스 킬머(Joyce Kilmer)의 시구(詩句)가 문득 떠오르던 날. 그러고 보니 나는 수없이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나를 싣고 다닌 기차에 대해 별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아 기차역에서 내리며 조금 부끄러웠다.

18.
오늘은 ㅂ 수녀님을 따라 잠시 자갈치 시장엘 다녀왔다. 오랜만에 가서 본 억센 사투리의 생선장수 아줌마들, 아직 바다를 그리워하는 듯 펄펄 살아 뛰는 많은 종류의 생선들, 장을 보러 나온 이들의 건강한 웃음과 목소리들에서 내가 느끼는 삶의 진한 향기와 진지함 같은 것.
나처럼 너무 고요한 수도원 분위기 속에서만 살다보면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뜨거운 땀과 눈물, 깊디깊은 고뇌를 잊어버리고 '자기' 안으로만 감겨 가는 달팽이 같은 삶을 살기 쉽다. 그러기에 가끔은 일부러라도 시장터에 나가보고, 만원 전철을 타보며 인간의 냄새를 가까이 맡음으로써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을 위한 기도를 결코 잊지 않는' 수도자로서의 몫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9
목소리도 무척 아름답지만 생긴 모습 또한 아름다운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캐스린 베틀의 독창회를 비디오 영상으로 보았는데, 그의 노래하는 표정, 걸음걸이, 청중에게 답하는 웃음과 인사법 등이 너무도 훌륭했다. 노래마다에 혼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그의 음성과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며칠 동안 내내 그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많은 이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숨은 노력, 숨은 아픔도 떠올려 보았다. 아름다움의 힘, 아름다움의 여운, 아름다움의 공유(共有)
우리가 미처 눈이 뜨이지 못해 발견 못하는, 묻혀있는 아름다움도 세상엔 너무 많은 것 같다. 이기심과 욕심을 덜어내고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면 아주 작은 것에서도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20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 조카 향이가 어느 날 적어 보낸 바람에 대한 고운 생각을 다시 읽어본다.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으니 분명 '없는' 것인데, 우리는 바람이 존재함을 안다.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바람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아름다운 애수에 흠뻑 젖는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며, 때로는 텅 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21.
소설가 ㅂ 선생님의 어린 손녀인 지상이가 엄마, 이모네와 같이 우리 수녀원에 놀러 왔는데, 유난히 바다를 좋아하는 만 네 살 된 어린 소녀와 대화가 되어 기뻤다. 내가 아끼는 커다란 소라 껍질을 주며 파도소리가 들리느냐고 했더니 너무 잘 들린다던 그 애의 맑은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름에 큰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7명의 젊은 수녀들을 생각하며 '난 요새 파도가 미워졌어' 하고 말했더니 '응, 그래? 난 파도가 좋은데, 안 미운데...' 하며 밝게 웃던 아이. 어린이의 천진함 앞에선 누구라도 착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

ⓒ이해인(수녀) <꽃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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