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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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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2880
외면해선 안 될, 외면할 수 없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였을까요? 아련한 시간을 더듬어보지만 허옇게 빛이 바랜 흑백사진 같은 시간들이 마구 순서가 엉겨 딱히 떠오르는 순간이 없습니다. 예의 수줍고 선한 그의 웃음이 떠오르는 매순간마다 눈에 선해 처음 만났던 순간을 찾아내기가 더욱 쉽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첫 예배를 드리던 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눈깨비 사납게 날리는 빈 들판을 한없이 지나 땅 끝을 향하듯 찾아들어간 곳. 거기서 다시 비포장 길을 달려 만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동네. 그나마 진눈깨비가 잠시 잦아든 갑수네 집 마당, 서너 평 되는 사랑방 예배처소를 두고 빙 마당에 둘러서서 예배를 드리던 단강교회 창립예배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 누가 누군지를 몰랐으니까요.
비록 잎담배를 널어 말리던 사랑방을 치워내고 시작하는 초라한 예배였지만 마을에 처음으로 교회가 들어서는 그 시간에 그가 빠졌을 리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 어디선가 마른 몸을 옹크리고 앉아 그 모든 과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겠지요.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얘기가 고파 몇 번이고 사택 주변을 배회하다 우연처럼 전도사를 만나고,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다 다시 내려와 그래도 빠뜨린 얘기가 있다며 얘길 또 하고, 어쩌면 그런 순간이 그를 처음 만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배 중에 문이 열렸고, 뒤늦게 예배당을 찾은 그의 손엔 한 다발 꽃이 들려 있었습니다. 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들꽃이었습니다. 들에서 일하던 차림 그대로인 그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인데도 망설일 것도 없이 앞으로 나와 제단에 선 내게 꽃을 전했고, 꽃을 받아든 나는 정성스레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올려놓고 보니 꽃을 담아온 병은 소주병, 그렇게 마음을 젖게 했던 날은 아마도 그를 만나지 제법 여러 달이 지난 후였지 싶습니다.
우리 목사님 마음을 움직여서 이쁜 색시 하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던 순간은 분명 우리가 만난 지 꽤 여러 해가 지난 후였을 테고요.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니까요.
작실 음짓말 언덕배기, 동네로부터 서너 걸음 물러선 듯 자리 잡은 그의 집은 그나마 사람의 온기로 겨우 버티고 있지 싶었습니다. 기우뚱 기운 토담집 시커멓게 그을린 흙벽에는 서툰 글씨로 적힌 글 하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유난히 키가 작은 그의 막내 동생 봉철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까치발을 하고서 쓴 글이었습니다. 한창 꿈을 키울 나이, 그런데 봉철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글을 벽에 적었을까,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모를 그 글은 봉철이의 얼굴과 함께 화인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찾아가 창립 예배를 드린 첫 목회지, 그렇지만 시간을 잊고 고향처럼 살았던 단강에서 만난 이웃들 중에는 광철 씨가 있습니다. 비쩍 마른 몸매, 흐릿한 눈빛, 더듬는 말투, 누구 하나 선뜻 가까이 가지 않았던 그는 늘 내 곁에서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고는 했습니다. 외면해선 안 될, 외면할 수 없는 이웃이 가장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광철 씨의 웃음은 지금도 눈에 선한데 그가 가르쳐 준 가르침을 나는 지금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위의 글은 <아름다운 동행>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 코너에 쓴 글입니다. 2008.1.3.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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