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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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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긴팔 옷들을 꺼내놨는데 비 온 뒷날 급 추워지자 두툼한 패딩을 찾아 입었어. 집에선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댕겨도 되지만 나들이 땐 곤란하잖아. 삽화 말고 내 큰 그림은 기괴하고 화사한 일색이니 옷도 엄청 화려하게 입을 것 같으나 전혀 아니올시다. 옷장 속 대부분 옷들은 검정이나 바랜 회색, 국방색. 칙칙한 수도사 같아. 하와이에선 달라지겠지. 예쁜 몸매를 지닌 애인이랑 섬나라에 놀러 가면 확 달라질고얌. 메고 다니는 가방은 그래도 화사한 편. 내가 그림을 그려 만든 에코백. 천가방 하나 들고 지구별을 배회하는 순례자.
하루는 단골 갤러리 바 트뤼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뮤지카 스콜라’라는 제목. 고전음악 해석학. 유화 물감으로 풀어본 바흐와 베토벤, 리스트와 쇼팽의 생애. 찾아온 벗들과 놀다 이모네 해장국에서 조개해장국 한 그릇. 밤안개가 밀려들기 전 산골로 탈래탈래 귀가.
낙엽이 서걱대는 밤길은 아름다웠다. 김광균 시인이 그러셨다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같다고. 폴란드산 ‘쇼팽 보드카’ 한잔과 낙엽의 밤은 얼마나 이국적인가. 밤길에 불빛을 비춰 가장 잘 마른 걸로 주운 낙엽 한 장. 에코백에 비슷한 천을 잘라 포인트를 줘봤다. 바늘로 한 땀 두 땀 기우는데 입에서 동요가 절로.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 길은 고운 길… 트랄랄 랄랄라 노래 부르며 산 넘어 물 건너가는, 가을 길은 비단길.” 초딩 4학년 말고 늙다리 4학년들도 이 동요를 좋아한다네. 노랑 빨강 파랑 내 에코백들. 보통 그 속엔 읽다 만 시집, 공책과 필기구, 아이패드, 음반 몇 장. 가끔 길에서 만난 들꽃 한 묶음, 낙엽 한 장이 담겨 있지.
가방을 빼앗겨 소지품 검사를 당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본 적도 있었다. 너무 황당하게도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하이네를 비롯한 시인들의 시집조차 불온서적이었다. 대관절 정부가 공인하지 않는 역사책들은 불온서적 취급을 당하게 생겼다. 길에서 무작위로 소지품 검사를 다시 시작할 날도 머지않은 듯. 석기시대 석탄처럼 새까만 시대 분위기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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