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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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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671.
노수녀(老修女)의 기도
요세파 수녀님께 -
눈을 감으면
당신을 섬기며 살아온 나의 생애가
10월 단풍숲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그토록 오랜 날을
청정한 나무처럼 꿋꿋하던 제가
한 장 낙엽처럼 쓰러지던 그 날
처음으로 살을 에는
죽음의 바람소릴 들었습니다
이젠 휠체어에 겨울 실려 다니는
저의 야윈 삶을
당신에게조차 보이기 싫어
날마다 눈을 뜨면
자신과의 새로운 싸움이었습니다
때때로 당신을
바보라고 원망했음을 용서하십시오.
80평생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는 제가
머지 않아 당신을 만날 기쁨보다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잠 못 드는 밤이 많음은
어인 까닭입니까
지금의 제가 지닌 것이라곤
청빈(淸貧)의 향기 묻은
십자가와 묵주 하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첫영성체 선물로 준
나무 묵주 사이로
황해도 곡산의
고향집 울타리가 보이고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고
맑은 샘물이 보입니다
연길 수녀원의 빨래터와
6.25의 피난 길이 보이고
제가 돌보던 밭의 열매들
그리 사랑하던 꽃과 새와
어린 짐승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평생의 손때 묻은 이 묵주를
보석처럼 손에 쥔 채
영원히 먼 길을 떠나는 그날
그날은 50여 년 전
제가 첫서원하던 10월의
황홀한 예식처럼
늦가을의 단풍숲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바치는
마지막 참회의 기도처럼
나뭇잎들이 불타오르다 못해
핏빛으로 무너져 내리게 하소서
언젠가 꿈에 만나
정답게 얘기한 일이 있는
멀고도 가까운 하느님
불타는 단풍숲의 마지막 사랑이시여
ⓒ이해인(수녀) <시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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